[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음식과 영성의 관계는

입력 2013-03-15 17:28

초등학교 4∼5학년 때가 아닐까 싶다. 우리집에서 가까운 곳에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친구가 있었다. 한번은 그 친구 집에 들렀는데 그때의 기억이 지금껏 생생하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고 할머니는 손자에게 점심을 차려주고 있었다. 그 친구는 상도 없이 적당히 부엌에 걸터앉아서 점심을 먹었는데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커다란 대접을 꺼내더니 보리쌀이 잔뜩 섞인 밥을 가득 담았다. 그러고는 대파를 꺼내어 숭숭 써는 것이었다. 어릴 적 나는 생파를 무척이나 싫어해 콩나물무침 등에 섞여 있는 파를 애써 골라내고서야 밥술을 들곤 했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저 생파를 그냥 먹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파를 한 움큼 집어 밥 위에 휙 하니 뿌리고는 간장 한술을 둘러주는 것이었다.

“저걸 어떻게 먹나, 김치도 없을까.” 달걀 프라이가 맛이 없다고 음식 투정을 부리곤 하던 어린 나에게는 아마도 이런 종류의 물음이 저절로 떠올랐겠다. 그 친구는 숟가락을 들더니 “할머니 그런데…”하고 명랑한 웃음으로 말을 이어가며 맛있게 밥을 먹는 것이었다. 할머니도 손자를 향해 다정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오직 파와 간장으로만 버무려진 비빔밥, 그것조차 맛나게 먹으며 밝게 웃던 친구의 명랑함과 할머니의 사랑스런 마음, 이런 것은 얽히고설켜 내 기억 속에 소리 없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가 기독교 영성을 공부하던 중 ‘파비빔밥’에 대한 그 기억은 슬그머니, 하지만 강렬하게 되살아났다.

먹고 입는 것에서 출발하는 영성

파비빔밥 이야기가 새삼스러운 것은 영적인 삶이란 먹고 입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사막 기독교인들의 확신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주의 문제를 신앙과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달리 사막의 기독교인들은 먹고 입는 것에서 영성이 출발한다고 보았다. 혹자는 이런 태도를 놓고 사막의 수도자들이 기독교적 율법주의자들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신앙적인 잣대로는 율법적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사막의 기독교인들은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음식에 관해 까다로운 규정을 고수했던 유대교도 정결함과 부정함을 기준으로 하여 먹을 수 있는 고기와 금해야 할 고기를 구별해 놓았다(레 11장). 그런데 사막의 기독교인들은 고기 자체를 금했으니 유대교보다 더 엄격한 음식 규정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파코미오스의 스승인 팔라몬에 얽힌 일화다. 팔라몬은 엄격한 기도생활로 몸을 혹사해 그만 중병을 얻게 되었다. 왕진을 왔던 의사는 간이 안 좋으니 푹 쉬고 음식을 잘 섭취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놓았다. 제자 파코미우스는 스승을 위해 정성스레 고기 수프를 준비했다. 그러나 수프를 맛본 팔라몬은 수프에 고기가 들어있는 것을 알고 거절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건강을 되찾자고 고기를 먹을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오히려 팔라몬은 의사의 처방을 무시하며 몸을 더 혹사하며 기도와 금식에 매진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십자가의 고난을 자신의 육체로 채우고자 하는 팔라몬식의 고난의 신학은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자학적이다.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는 태도

팔라몬과 달리 후대의 수도자들은 몸의 건강을 중시했는데, 몸이 아프면 기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1970년대 발굴 결과 사막 수도자들의 거주지에서 소금에 절인 생선 등 저장음식이 발견됐다. 본래 수도자들은 물에 불린 콩을 통해 단백질을 보충하곤 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육식을 금하는 사막 기독교인들의 식이요법은 새로운 율법주의다. 하지만 단순한 음식을 적당히 섭취하되 특히 ‘맛’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는 사막의 식이요법에 대해서는 찬성표를 던져주고 싶다. 피오르라는 이름의 수도자는 서서 왔다갔다하며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이유는 맛에 너무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맛을 느끼지 않기 위해 서서 음식을 먹었다니 이 또한 지나치다. 맛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싱겁거나 짜면 또 그런대로 개의치 않고 감사함으로 받는 태도가 적당하겠다.

우리 사회에서는 음식 ‘맛’도 이데올로기인 것 같다. ‘맛집’이니 ‘손맛’이니 하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맛’을 중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에서 요리사 자격증을 딴 후 그곳의 별 세 개짜리 레스토랑의 디저트 파트에 취직한 한인 청년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레스토랑의 주인이 강조하는 것은 맛이 아니라 위생이며, 식당 위생을 소홀히 하면 별을 잃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조미료나 합성첨가물 사용도 결국 맛을 구하려다 우리 스스로 걸려든 올가미다.

괴테는 눈물을 흘리며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의 힘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괴테의 말을 되받아 이렇게 말하고 싶다. ‘파비빔밥’ 같은 것조차 감사의 눈물로 받을 수 있다면 하늘의 힘을 알게 되리라고 말이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