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원주희 목사] 삶의 길이는 하나님의 주도권, 죽음은 ‘천국으로 이사’
입력 2013-03-15 17:28
20년간 말기암 말기 원주희 목사
“우리 ○○○님, 오늘 식사 맛있게 하셨죠. 잘 지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가 옆에 있으니까요, 힘내세요.”
샘물호스피스선교회 회장 원주희(61) 목사는 환우들의 손을 잡고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의사가 회진하듯 매일 점심시간마다 40개의 병실을 돌며 안부를 묻는 원 목사에게 환우들과 가족들도 살갑게 인사했다.
“목사님, 이렇게 가족과 지내며 예배드릴 수 있어 행복해요!” 휠체어에 앉은 채 앙상한 팔로 원 목사에게 팔을 내밀며 웃어 보이는 환우에게 그는 “항상 웃으셔서 저도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오늘도 따님과 행복하세요”라고 답했다.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눈물을 흘리는 환우도 있었다. 그의 인사를 받자마자 어린아이처럼 울던 한 중년여성에게 원 목사는 어깨에 손을 얹고 즉시 기도했다.
“하나님, 이렇게 많이 힘들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주셔서 세례 받게 하시고 어려움 잘 견디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너무 외롭지도, 아프지도 말게 하시고 두렵지 않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아멘. 하나님께 맡깁니다.”
20년간 말기암과 말기에이즈환자를 돌본 원 목사를 지난 8일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샘물호스피스병원에서 만났다. 병원에서 그와 마주친 말기 환자 대부분은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원 목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만의 독특한 인사법인지 물었다.
“빈말이 아니에요. 환우들이 죽음을 앞두고 허무감에 빠져 지낼 거라 생각하지만 참 밝고 행복하게 지내요. 하나님의 집인 천국으로 이사 간다 믿고, 거기서 가족을 만날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죠. 그러다보니 덩달아 가족들 표정도 밝게 바꿔요. 이분들에겐 더 이상 죽음은 끝이 아니거든요. 이게 복음의 힘 아닐까요.”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다
3남2녀의 넷째로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난 원 목사는 어릴 때부터 몸이 늘 약했다. 병약하고 소심한 자신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의료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의약계 종사자가 되면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71년 중앙대 약대에 진학한 그는 질병 예방, 통증 완화에 천착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군대에서 깨졌다. 학군사관(ROTC)으로 입대한 원 목사는 부대 대항 스케이트 대회 연습을 하다 넘어져 고관절 인대를 다쳤다. 일반 진통제로는 통증이 줄지 않아 모르핀까지 썼지만 헛수고였다. 약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던 그에게 문득 죽음의 공포가 찾아왔다. 그가 군대에서 죽음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입대 초반 앰뷸런스가 도로를 이탈해 전복됐을 때도 그랬고, 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이 미군을 도끼로 내리쳐 사망케 한 ‘8·18 도끼 만행사건’ 당시 한 달간 출동 대기 상태로 지낼 때도 느꼈다.
‘불시에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해소키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진중세례’였다. 종교는 없었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관절 통증 앞에선 효과가 없었다. 세례를 받아도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고통은 끊이지 않는 듯 보였다.
병상에서 고통을 참아내던 어느 날, 그에게 군종병과 기독교인 병사들이 찾아왔다. 이들이 손을 잡고 찬양과 기도를 해 주는데 놀랍게도 통증이 사라졌다.
‘의학의 한계를 신앙이 뛰어넘을 수도 있구나. 이게 하나님의 능력인가!’
통증이 줄면서 그의 마음엔 평안이 깃들기 시작했다. 약에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니 점차 신의 존재가 믿어졌다.
하지만 곧 그의 믿음에 위기가 찾아왔다. 전역 2년 만인 79년 서울 영등포시장 인근에서 약국을 개업한 원 목사는 돌연 폐결핵에 걸렸다. 퇴근할 때면 돈세는 것이 귀찮을 정도로 수입이 많았던 그에게 폐결핵은 치명적이었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가정을 꾸렸던 터라 그의 낙담은 더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 1년 만에 나았으나 인생에 대한 본격적인 회의를 느꼈다.
“성적이 좋아 대기업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졸업했고, 임관할 때 국무총리상을 받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았어요. 그런 제가 왜 자꾸 사고가 나고 병에 걸리는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시련이 잦아지니 하나님께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이 있다면 내게 이럴 순 없다’는 마음으로 매일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순전히 ‘신은 허구다’라는 제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원 목사의 뜻과는 달리 성경말씀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죽음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성경말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 죄와 죽음을 해결하러 오셨고, 이 때문에 제가 값없이 영생을 얻게 됐다는 성경말씀을 읽었을 때,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죽음 이후 영원한 삶을 주셨다는데 더 이상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죽음의 공포에서 해결되니 그간 돈 버는 데 목숨 걸었던 일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우울했던 제 삶도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당신도 죽음의 고통서 자유로울 수 있다
예수께서 죽음의 고통을 해결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원 목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약국에 오는 손님들마다 복음을 전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약국 밖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승합차 한 대를 샀다. 온 가족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전도하기 위해서였다.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원 목사는 다른 이에게도 자신과 같은 감격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들에겐 특히 그랬다. 이들에게도 자신이 체험한 자유와 행복을 느낄 기회를 주고 싶었다.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찾던 중 그는 한 외국 잡지에서 ‘호스피스(hospice)’를 알게 된다. 잡지는 ‘호스피스란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평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활동으로 영미권에서 확산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꿈꾸던 것과 부합하는 사역을 찾은 원 목사는 뛸 듯이 기뻤다.
약국을 개업한 지 4년 만인 83년, 그는 호스피스를 공부하기 위해 약사 생활을 정리하고 호주로 유학을 떠날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유학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온 가족의 강력한 반대로 유학행을 포기한 원 목사는 다시 약국을 여는 대신 의료보험연합회에 취직했다. 안정된 직장이지만 호스피스 사역을 하겠다는 그의 뜻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야간에 장신대 선교훈련원을 다니며 꿈을 키우던 원 목사는 86년 회사를 그만두고 합동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사회복지 차원을 넘어 복음으로 희망을 전하는 호스피스를 세우려면 신학적으로 견고한 바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장생활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종교단체서 운영하는 의료기관도 법망을 피해 의료보험을 부정 청구하는 걸 보면서 법이나 제도로 인간이 선해질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복음을 명확히 알고, 그 앞에 바로 서지 않으면 저도 마찬가지다 싶어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서울영동교회를 거쳐 한영교회에 전도사로 파견된 그는 89년 ‘샘물약국’을 열어 주중엔 노숙인과 행려병자에게 무료로 약을 처방했고 주말엔 설교를 했다. 헌금을 모두 구제비에 사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도사 사역을 마친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지 1년 뒤인 93년에 ‘샘물호스피스병원’을 경기도 용인시 가창리에 개원했다. 호스피스 사역의 뜻을 품은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천국에서 봅시다
말기암 환우를 한 달에 30여만원의 돈만 받고 가족 같이 성심껏 돌본다는 소문이 나자 외진 곳에 있던 병원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2007년부터는 에이즈 감염자도 호스피스 환우로 돌봤다. 개원 당시 1명으로 시작한 이래 2013년 현재 환우 5600여명이 이곳을 거쳤다.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도 1만6000여명을 배출했다.
물론 20년간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지역 주민들이 병원을 혐오시설이라며 반대해 2번 이사를 가야 했다. 소송과 주민 설득을 거쳐 3번째로 이사 온 경기도 용인시 고안리가 현재의 정착지가 됐다.
환우들의 잘못된 신앙관도 그를 힘들게 했다. 목회자의 안수기도와 중보기도의 힘을 믿는다며 죽음을 받아들이길 거부한 이들도 있었고, 거동이 불가능한데도 무조건 모교회 예배를 고집한 환우도 적지 않았다.
“기도, 찬양, 예배, 헌금은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은혜의 도구인데 이를 이용해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아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 뜻이 이루어지이다’는 샤머니즘에 근거한 기도지요. 삶의 길이는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있습니다. 생명을 맡기는 믿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생명 주도권 싸움에서 이기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니까요.”
샘물호스피스병원에서 환우들이 지내는 기간은 평균 한 달 정도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이상을 넘기는 경우가 잘 없다. 두 달 정도 이곳에 있으면 일반 병원으로 치면 장기 입원환자에 해당될 정도다.
그럼에도 이곳에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상당수 환자들이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배시간이나 식사 도중 시신이 지나가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 안타까워하는 가족과 의료진, 봉사자들에게 오히려 “우리 천국에서 봅시다.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란 말을 남기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 복음적 죽음관을 받아들여 두려움을 극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환우들의 죽음을 보고 변화된 유가족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3개월에 한 번씩 유가족 모임인 ‘기러기 가족 모임’을 갖는데 남아있는 가족들이 신앙으로 삶을 잘 추스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뭉클하지요. ‘우리 환우는 천국교회, 유가족은 한국교회로 갔구나’란 생각에.”
더 많은 말기 환자들의 ‘천국 이사’를 돕기 위해 원 목사는 여러 목표를 세웠다. 그는 지난해부터 병원 옆에 40개 병상을 갖춘 쉼터 건축을 시작했다. 이 건물이 완공되면 병상이 모두 80개가 된다. 그렇게 되면 최대 60명에 달하는 대기환자들의 병상 부족 현상이 꽤 해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외에 호스피스 프로그램 100개를 보급하는 것도 목표다. 이미 국내 40곳, 네팔, 브라질, 몽골, 에콰도르 등 국외 10곳에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나눴다. 물적·인적 자원이 부족하지만 호스피스 사역을 위해 지난 10년간 그랬듯 계속 기도할 계획이다.
복음 안에서 준비된 죽음을 강조하는 원 목사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유언장에도 썼지만 저는 ‘절망적인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복하게 해 주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합니다. 그때까지 부르시면 언제든 간다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 남은 시간을 살 것입니다.”
용인=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