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우 칼럼] 수난 주간에 묵상하는 욥의 고난과 소통
입력 2013-03-15 17:15
초대교회는 욥기를 수난 주간에 읽었다. 이미 신약성경에서 야고보는 욥을 고난 중에 인내하는 신자 모델로 그렸다(약 5:11).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야고보의 전통을 따라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하지만, “주신 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다”(욥 1:21)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을 신자의 모범으로 보았다. 초대교회는 욥의 고난을 묵상함으로써 큰 위로를 받았고 욥의 모습 속에서 모든 수난을 감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았다.
욥과 예수는 공통점이 많다. 그들은 둘 다 흠이 없고 순전하며 죄가 없는 의인으로서 고난을 받았다. 물론 둘 사이에는 차이도 크다. 욥은 고난을 억지로 받지만 예수는 자발적으로 받는다(빌 2:6∼8). 욥은 고난 가운데 불평을 하지만,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복한다. 고난의 성격에 있어서 욥의 고난은 자신의 실존과 연관되어 있지만, 예수의 고난은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적 의미를 갖는다(사 53장). 그리고 욥은 고난 가운데 그를 위하여 말해줄 중보자를 소망하지만(19:25∼26) 예수는 친히 중보자가 되신다(딤전 2:5).
우리가 욥기를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욥은 사실 인종하는 욥(patient Job)이 아니라 분노하는 욥(angry Job)의 모습이 더 지배적이다. 그의 수동적인 인내는 2장에서 끝나고 3장부터는 자기 생일도 저주하고 소외감에 대해 애통해하고, 하나님께 대들며 때로는 원망한다. 그는 그를 위문하기 위해 먼 나라에서 자비량으로 찾아온 세 친구들과 죽을힘을 다해 논쟁한다. 사실 친구들과의 논쟁이 책의 절반을 차지한다(4장∼27장). 마지막으로 욥은 자신에게 이유 없는 고난을 준 하나님을 법정에 고발한다(31:35).
그렇다면 인내하는 욥과 분노하는 욥은 다른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인내를 생각할 때 속으로 참고 침묵하며 이를 악물고 견디는 수동적 인내를 생각한다. 그러나 인내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인내가 있다. 부모의 자식을 위한 인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인내는 매우 능동적이고 긍정적이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회개만 하면 모두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엘리바스, 그의 자식이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빌닷, 그에게 은밀한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소발과 한치 양보도 없이 열정적으로 싸운다. 이 친구들과의 능동적인 싸움 때문에 욥은 발전하고 있다. 욥은 하나님까지 고발하였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야생 짐승들의 퍼레이드를 펼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욥은 결국 자신이 당한 고난의 이유는 듣지 못하지만 슬픔과 분노의 에너지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눈으로 보면서(visio dei) 갈등이 해소되는 체험을 한다(42:5). 마지막으로 욥은 그의 세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들이 욥에 대해 잘못 말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만든다(42:7∼9).
욥의 능동적인 인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다. 그러나 이 과정이 없었다면 그는 친구들과의 소통하는 자리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 능동적인 욥의 인내가 수난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에 그림자가 된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이 꽉 막힌 상황 속에 살고 있다. 남북한의 대치는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새 정부는 출범한 지 거의 두 달이 되어가도 아직 내각조차 제대로 구성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청년 자살률과 노인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최고로 높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한국교회는 큰 교회나 작은 교회를 막론하고 총체적으로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다. 한 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교회 안에서 위로받던 교인들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고 울고 있다.
사순절을 통과하며 수난절을 앞두고 우리는 다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욥기를 읽었으면 한다. 그리고 욥과 함께 우리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토해내고 때로는 주 안에서 분노도 드러내어 보았으면 한다. 아마 그럴 때 우리는 타인을 향한 지적과 비판이 아니라 나 자신 안에 있는 분노와 슬픔과 상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욥의 분노와 우리의 분노를 넘어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한 예수의 수난과 온전한 인내를 본받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막힌 관계에 참된 소통을 이뤄가게 될 것이다.
(총신대 구약학 교수, 한국신학정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