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진 곳에 온기를!] 4년전 죽어가던 이웃을 살렸다… 그 후 ‘천사의 날개’ 단 시흥동 명자씨
입력 2013-03-15 17:03 수정 2013-03-15 17:11
복지사각지대 보듬는 아줌마의 힘
두드리고 또 두드린 끝에 30분 만에 현관문이 열렸다. 시선이 닿는 곳에 사람이 없어 내려다보니 그제야 사람이 보였다. 배를 바닥에 댄 채 다리를 끌며 기어온 남자.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고름이 현관부터 거실, 방까지 동선을 따라 길을 만들었다. “그때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안 나와요.” 김명자(61)씨가 고개를 저었다.
사업실패 후 아내는 집을 나갔고 칩거한 남자는 계속 술을 마셨다. 지병인 당뇨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곧 다리에 괴사가 시작됐다. 남자가 썩어가는 두 다리에 빨간약을 바르며 버티는 동안, 초등학생 두 아이는 하루에 한두 알 계란을 부쳐 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몇 달씩 집세가 밀렸지만 가난한 동네의 집주인은 밀릴 만한 사정이 있나보다, 채근하지 않았다.
그래도 닫힌 문 너머로 소문은 흘러나왔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골목 모퉁이에 모여 수군댔다. “애들은 보이는데 아저씨가 안 보여. 아무래도 이상해.” 어느 날 수다쟁이 아주머니들이 지나가던 명자씨를 붙잡고 ‘제보’를 했다. “저 집 한번 가보세요.”
그길로 구급차에 실려 간 남자는 두 다리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아이들은 수소문 끝에 집 나간 엄마를 찾아 보내줬다. 20년 넘게 서울 시흥3동에서 치킨집을 하며 동네일이라면 소매를 걷어붙여 온 김명자씨는 4년 전, 산 채 썩어가던 남자를 살려낸 뒤부터 시흥동의 해결사가 됐다. 아주머니들의 정보력은 무서웠다. 누군가, 어디선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문은 금세 김씨의 귀에 들어왔다. 지난해 7월에는 금천구청이 출범시킨 ‘통통희망나래단’에 소속돼 아예 복지 사각지대를 발굴해내는 ‘전문요원’으로 활약 중이다.
통통희망나래단은 평균 거주기간 17년인 주민 60여명이 어려운 이웃을 발굴해 구청 서비스와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한 달 20만원 활동비를 받긴 하지만 업무량을 따지면 봉사직에 가깝다. 금천구는 나래단 덕에 벌써 90여건의 신규 복지대상자를 찾아냈다.
‘예술가 가족’을 구한 것도 시작은 제보였다. 지난해 7월 아주머니들이 길 가던 김씨를 잡아끌었다. “새 빌라 있잖아요. 거기 5층집에서 바퀴벌레들이 기어나온다대요. 밤에는 싸우는 소리도 들리고.”
빌라를 찾아간 김씨는 일단 도시가스함부터 체크했다. 가스는 이미 끊겨 있었다. 우편함에는 몇 달치 고지서가 쌓여있었다. 문을 두드렸다. 답이 없었다. 포기할 김씨가 아니었다. 두드리고 기척을 살피길 며칠. 드디어 30대 여자가 현관문을 열었다.
“부부랑 초등학생 한 명이 사는데, 집안이 TV에 나오는 쓰레기집 있잖아요. 딱 그거예요. 음식그릇에 잡동사니가 좍 깔려서 발 디딜 데가 없어요.”
사회복지사, 사례관리사 등 전문가들과 함께 다시 빌라를 찾았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함께 밥 먹으며 얘기하고 상담하길 6개월. 드디어 부부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남편은 기타 강습교본까지 낸 기타리스트, 아내는 프랑스 유학파 화가였다. 일거리가 끊긴 남편이 알코올중독에 빠지고 아내가 우울증에 걸리면서 고립이 시작됐다. 명자씨 도움으로 집을 치우고 상담을 받고 일거리를 찾으며 부부는 서서히 일상으로 복귀하는 중이다.
13일에는 이웃 동네에서 이사왔다는 청각장애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 소문이 제일 빠른 곳”이라는 최옥연 할머니의 사랑방에서였다.
“왜 이래 리어카 끄꼬(끌고) 댕기는 노인네 있잖여. 귀도 잘 안 드키는 거 같드만. 저그 빌라 2층에 산다카든가.” 그길로 명자씨는 제보 받은 집을 찾아냈다. 오후 3시 할머니 집. 그나마 좀 들린다는 왼쪽 귀에 대고 명자씨가 고함을 쳤다.
“언제 이사오셨어요?”
“2월 28일.”
“생활비는 어떻게 대세요?”
“(천원짜리 5장을 보여주면서) 하나, 둘, 서이, 너이, 다섯, 이거 3일 한 거야”
아들네 집에 살던 할머니는 세 손주, 며느리와 불화가 생기면서 보증금 100만원, 월세 15만원짜리 사글세방으로 지난달 혼자 이사를 왔다. 생활비는 폐지 주운 돈과 기초노령연금으로 꾸려나가는 듯했다. 명자씨는 오늘 밤 당장, 할머니에 대한 보고서를 쓰리라 마음먹었다.
돌아오는 길, 얼마 전 발굴한 배모(69) 할머니 집을 찾았다. 배씨 할머니를 찾아낸 건 이웃인 ‘폐지할머니’ 조유책(77)씨 덕이었다. 2011년 수해 때 살던 집 벽이 무너져 내린 뒤 폐가에서 폐지를 주우며 사는 조씨 할머니는 명자씨의 ‘관리 목록’에 들어있다. 기부 받은 라면이며 파스, 떡, 과일 같은 게 생기면 명자씨는 조씨 할머니네를 찾았다. 그렇게 물건을 건네고 안부를 묻던 어느 날, 조씨 할머니가 이웃집 배씨 얘길 꺼냈다.
“암이 재발했다나봐.”
그길로 배씨 할머니 집을 방문한 명자씨는 초등학생 손자를 혼자 돌보는 할머니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자궁암수술을 받은 지 5년 만에 유방암이 발병한 할머니는 지금 방사선치료 중이라고 했다. 부양의무자인 두 아들 때문에 기초생활수급 자격도 없어 형편은 어려웠다. 아들들은 시골 할머니(배씨 할머니 시어머니) 생활비와 배씨 할머니의 예전 수술비를 갚느라 여력이 없었다. “방사선치료 때문에 자꾸 어지럽네요.” 기운 없이 웃는 배씨 할머니의 손에 파스와 라면을 쥐어주고 명자씨가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오후 4시 명자씨의 아지트인 시흥3동 주민자치센터로 가는 길. 모퉁이 과일가게에 들렀다. 사장님이 검은 비닐봉지에 바나나 몇 송이를 넣어 건네며 멋쩍게 웃었다. “오늘은 좀 적어요.”
으뜸축산, 고려할인마트, 빵굼터, 과일나라, 명보약국, 녹십자약국, 명문당약국, 풍년떡집, 다솔식품, 코디미용실, 화평동왕냉면. 슈퍼는 라면 몇 박스, 약국은 파스 몇 통, 빵집은 빵 몇 봉지, 미용실은 공짜 이용쿠폰 몇 장을 형편 닿는 대로 한 달에 한두 번 명자씨에게 건넨다. 대기업의 수억원보다 값진 시흥3동 기부클럽의 기증품들이다. 이걸 명자씨는 한 달 내내 발품 팔며 동네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준다. 분배의 원칙은 ‘조금씩 자주’이다.
“바나나도 두 세 개씩, 라면도 5개 정도씩 나눠 드려요. 특히 어르신들은 자주 찾아뵙고 안부 묻고 정보 수집하고 그게 물건 자체보다 중요하거든요. 할머니들한테 라면을 한 박스씩 드리면 그대로 갖고 있다가 자식들 오면 통째로 줘버리기도 하고(웃음).”
명자씨가 정보 수집 노하우를 귀띔했다. 비법은 ‘정보의 허브’를 찾아내는 것이다.
“곳곳에 어르신들이 모이는 사랑방 같은 집들이 있어요. 거기 가면 동네 구석구석 진짜 얘기를 많이 들어요. ‘요즘 형편 어려운 분이 누구세요?’ 물었을 때 유독 한 어르신이 조용하잖아요. 그럼 눈여겨봤다가 그분이랑 제일 친한 어르신 찾아 슬쩍 묻죠. 그러면 얘기가 술술 나와요.”
여름이면 어르신들이 돗자리 편 동네 모퉁이와 경비실 쪽방에도 정보가 모인다. 음료수 몇 병 건넬 땐 별 얘기 없다가, 다음에 길에서 만나면 제보를 해온다. 그렇게 길어 올린 이야기들은 서류더미에 파묻힌 사회복지사들에게 귀중한 정보가 된다.
시흥3동 주민자치센터 사회복지사 오유경씨가 말했다. “사회복지사는 2년에 한 번씩 순환하기 때문에 동네의 속 깊은 얘기를 알 수가 없어요. 밀려오는 상담과 서류업무에 중요한 일을 놓치기도 하고요. 동네사정을 잘 아는 주민들이 나서주니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