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고승욱] 마천루의 저주
입력 2013-03-15 17:48
도이치방크의 리서치책임자였던 앤드류 로렌스는 1999년 ‘마천루 지수(skyscraper index)’라는 재미있는 지표를 제시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초고층빌딩이 등장하면 경제위기가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로렌스에 따르면 미국 뉴욕 맨해튼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싱어빌딩(47층·187m)이 공사 중이던 1907년에 20세기 첫 금융공황이 일어났다. 세계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102층·381m)이 착공됐다. 이 빌딩은 무려 4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영예를 누리다 1973년 월드트레이드센터(110층·417m)에 자리는 내줬다. 1973년 역시 1차 오일쇼크에 따른 주가 대폭락이 기록된 해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페트로나스 트윈타워(88층·452m)가 세워진 1998년에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은 금융위기의 충격에 빠져 있었다.
로렌스의 보고서에 등장하지 않지만 2010년 완공돼 현재까지 세계 최고의 빌딩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163층·828m)도 금융위기 속에서 이름이 바뀌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사람들은 ‘마천루 지수’보다 ‘마천루의 저주’ 또는 ‘로렌스의 저주’라는 말을 쓴다.
지금은 초고층빌딩의 개념도 달라졌다. “100m가 넘는 건물은 소방관의 재앙”이라고 외치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다. 100층은 돼야 “높은 건물이 섰구나”라고 알아준다. 세계 랭킹에 오르려면 높이를 ㎞ 단위로 계산하는 센스도 필요하다. 2017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킹덤타워는 높이가 1㎞다. 쿠웨이트는 1.001㎞ 높이의 부르즈 무바라크 알 카비르 빌딩을, 바레인은 1.022㎞짜리 머잔타워를 추진 중이다. 두바이는 한술 더 떠서 높이가 2.4㎞인 시티타워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우리나라에도 한때 거세게 불었던 초고층빌딩 건설 붐이 곳곳에서 역풍을 맞고 있다. 당장 용산역세권 개발사업이 무산될 위기에 놓이면서 메인빌딩인 트리플원(111층·620m)의 건설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의 랜드마크 빌딩(133층·656m) 사업도 중단된 상태다.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 장밋빛 전망만 앞세워 몇 년 뒤를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주라는 표현은 지나치지만 신중하지 못한 계획이 야기하는 피해는 너무 크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