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디지털 치매
입력 2013-03-14 20:42 수정 2013-03-14 22:44
한밤중에 휴대전화기가 고장이 났다. 갑자기 꺼지더니 아무리 전원 버튼을 눌러봐도 켜지질 않았다. 큰일 났다 싶었다. 그저 기계 하나 고장 났을 뿐인데 당장 아침부터 어떻게 하나 싶을 정도로 답답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전화번호, 해야 할 일과 주문해야 할 것들, 친구와의 약속 등 모든 것이 다 전화기 안에 입력돼 있건만 예고도 없이 먹통이 돼버리니 당황스러움을 넘어 심난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다섯 손가락을 못 넘기는지. 태블릿PC에 카카오톡을 깔아서 연락망을 확보해볼까 했더니만 본인 확인을 위해 휴대전화로 인증번호를 보낸다고 한다. 휴대전화의 문자를 확인할 수 없으니 한순간에 내가, 내가 아닌 것이 돼버렸다. 불편한 정도를 넘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다이어리나 수첩에 따로 적어둘 것을. 후회막급이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대체 언제부터 사람이 이렇게 허술해졌는지 말이다. 일본의 한 주간지에서 본 기사가 생각났다. 디지털 세대의 사고력에 관한 것이었는데 한 가지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세대의 특징 중에 하나가 자판이 없으면 글을 제대로 못쓰며 요약도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활자로 된 책을 읽고 손으로 글씨를 쓰던 세대에 비해 논리력과 암기력, 사고력과 상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문장을 구성하는 것은 자판을 칠 때와 뇌의 활성화 방식이 달라 뇌 발달에 훨씬 유리하다고 하는데 손 글씨를 써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어버이날 선물카드도 제대로 못 쓰고 고모에게 보내는 편지는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다가 결국 이메일로 대신했던 기억만 뜨끔따끔할 뿐이다.
손가락으로 톡톡 몇 자 입력만 하면 정보의 바다에서 피라미부터 월척까지 쌍끌이로 끌어다 주고 주소만 입력하면 그 집 문 앞까지 길이 열리는 세상. 그 기계적 혜택 속에서 스스로를 스마트하다고 여기며 살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디지털 치매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생각도 기억도 반편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의 뇌는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과감하게 삭제해버린다는데 디지털 기기의 편리함을 믿고 너무 많이 지워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연필을 쥔 손은 생각을 하고 기억하지만 자판 위의 손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이참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삭제된 정보를 되살려봐야겠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