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의구] 안철수의 짧은 모색
입력 2013-03-14 18:27 수정 2013-03-14 22:41
“국민 기대는 ‘국회의원 안철수’가 아니다. 새 정치 위한 치열한 반성 결과 보여야”
1992년 14대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이듬해 1월 26일 영국으로 떠났다. 정적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식 한달 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귀국한 것은 5개월여 뒤인 7월 4일이었다. 그는 귀국 후에도 경기도 일산에 칩거하며 한반도 통일 문제 등에 대한 집필과 연구에 몰두하며 정치와 거리를 뒀다. 그는 95년 정계복귀 선언을 하고 97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1998년 선거법 위반 문제로 의원직을 상실하자 미국으로 떠났다. 조지워싱턴대에서 1년간 공공행정학을 공부한 그는 1999년 12월 13일 귀국해 2002년 서울시장에 당선됐고 5년 뒤 대권을 잡았다.
지난 11일 귀국한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의 외유기간은 82일에 불과해 김·이 전 대통령보다 짧다. 귀국 후 곧바로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예비선거 운동을 시작한 것도 두 전직 대통령과 다르다. 정치권에서는 성급한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고 경쟁상대인 민주통합당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정치적 휴지기를 성공적으로 보낸 다른 정치인으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꼽힌다. 손 전 대표는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불과 81석을 얻는 참패를 당하자 7월 6일 대표직을 사퇴했다. 그는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며 춘천으로 떠나 칩거했다. 그가 정계에 정식으로 복귀한 것은 2010년 8월 15일이었다. 2년이 넘는 오랜 ‘반성’과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촌부 차림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신뢰를 심어줬다. 오랜 칩거와 모색은 ‘민생 대장정’ ‘민심 대장정’이란 트레이드마크를 그에게 부여했다. 2010년 10월 3일 당 대표에 복귀했고 지난해 4월 재보선에서 야권의 불모지인 분당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반대의 경우로 종종 거론되는 사람은 민주당 정동영 전 의원이다. 정 전 의원은 2007년 17대 대선과 18대 총선에서 패한 뒤 2008년 7월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8개월 만인 2009년 3월 22일 “고통받는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드리기 위해 돌아왔다”며 귀국해 전북 전주 덕진 재보선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복귀가 너무 빨랐다는 지적이 일었고 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이후 민주당으로 돌아왔지만 과거의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안 전 교수의 경우를 이들과 수평 비교할 수는 없다. 안 후보는 지난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야 직업을 정치인으로 적은 ‘신참’이다. 그동안 그가 정치적 위상에 비해 일선 정치경력이 거의 전무하다는 게 약점으로 지적됐다. 그가 내건 새로운 정치 가운데 의원정수 감축 문제나 정당 개혁 등이 현실 정치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혹평이 많았다. 그래서 그가 “현실과 부딪치며 텃밭을 일궈가겠다”면서 노원병 보궐선거 출마를 시작점으로 삼겠다는 것은 일리 있는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민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국회의원 안철수’가 아니다. 벤처신화를 이뤘던 혜안으로 기성정치를 혁신하고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달라는 게 ‘안철수 바람’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의 정치 재개 기자회견을 보면 새 정치에 대한 언급은 원론에 머물고 있다. 지난 대선 패배에 대해 “모든 것이 제 부족함이고 불찰이었다. 무한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지만 무엇이 부족했고 불찰이었는지 구체적 언급이 없다. 그래서 지지자들은 답답하고, 정적들은 공격의 빌미를 잡았다.
그가 선거에 당선돼 의정활동을 하더라도 299명이나 되는 의원 중 1명에 불과해 얼마나 두각을 나타낼지 미지수다. 국회에는 그의 사람마저 별로 없다. 대선 후보로서 역량을 재평가 받을 수 있는 대선까지는 아직 4년 이상이 남았다. 신당 창당 과정을 통해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유보상태다. 안 전 교수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짧은 모색기간에 얼마나 깊은 반성을 했고 새 정치의 칼을 벼렸는지를 밝히는 일이 필요하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