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독을 껴안는 아주 조심스런 뒤척임… 조경란 신작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 펴내

입력 2013-03-14 17:17


일요일의 철학/조경란 신작 소설집/창비

시선이 한층 성숙해지고 이야기의 여백이 좀 더 넓어졌다. 조경란(44)의 신작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창비)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다. 8편의 수록작 가운데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은 그가 2008년 한국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 버클리대학에 머물던 시절의 경험을 담은 표제작이다.

주인공 ‘나’는 집과 가족을 떠나 미국의 한 대학 도시에 도착하지만 여전히 삶에 대한 막막한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다 거리 중심에 있는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는 일본인 남자를 알게 되고 그 남자로부터 자신의 어린 아들 세이지를 하루 동안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아이가 엉겁결에 내 팔을 탁 소리 나게 밀쳐냈다. 그 바람에 옆에 놓았던 내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중략) 아, 쏘리! 제풀에 놀란 아이가 고양된 톤으로 사과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길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다.”(‘일요일의 철학’)

아이가 가방 주변에 참깨처럼 작고 까맣게 뿌려진 것들을 가리키며 “그게 뭐냐”고 묻자 화가 치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씨앗이야.” 집을 떠날 때 가방에 넣고 온 씨앗 봉지가 터진 것인데 ‘씨앗’이라고 말한 순간, 아이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는 차츰 사라지고 아이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나’는 짐짓 삶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점이 귀하게 읽혀지는 건 그동안 외부 세계와 쉽게 타협하지 않은 채 내면 응시에 천착해 왔던 조경란 소설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건 타인을 수용하는 작가의 품이 그만큼 넉넉해졌음을 의미한다.

마침내 그곳을 떠나기 며칠 전, ‘나’는 방 안에서 혼자 연습하던 인라인스케이트를 들고 밖으로 나와 곧게 뻗은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지듯 발을 내디디며 중얼거린다. “눈앞에 내리막길이 가늘고 긴 소실점처럼 보였다. 나는 지금 추락하고 있는 것일까? 다리를 뒤로 더 쭉 뻗으며 반문했다. 이것이 나의 속도일까? 허리는 더 낮게, 눈은 더 먼데로 던졌다.”

또 다른 수록작 ‘파종’은 주인공 ‘나’가 팔을 다쳐 집안일을 못하는 일본 도쿄의 여동생을 돕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동생네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경비나 청소부로도 써주지 않을 나이에 숙부에게 사기를 당한 아버지, 아버지의 주정 때문에 하루하루가 우울했던 가족은 낯선 타국의 공간에서 마주하면서 점자 서로의 존재를 가슴에 품기 시작한다. “이것도 못 읽어? 여기 쓰여 있잖아. ‘호오렌소오’.” “호오, 렌소오?” “그래, 시금치.” “…!” “아, 그게, 그러니까 꽃씨가 아니었냐?”

아버지는 외출했다가 사온 씨앗을 화분에 심고 꽃이 피기를 기대했지만 그건 시금치 씨앗이었던 것. 하지만 이 씨앗을 통해 ‘나’와 아버지는 상처와 갈등을 뒤로 한 채 관계의 진전을 이룬다.

‘학습의 生’의 주인공 ‘나’는 은퇴한 고등학교 윤리교사다. 이혼 후 만성적인 면역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외따로 시골에서 생활을 꾸려가는 ‘나’에게 한 소년이 나타난다.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투포환 선수의 꿈을 접은 소년에게 투포환 연습을 하라고 집 마당을 빌려주면서 ‘나’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하지만 지갑을 잃어버린 ‘나’는 소년을 의심하게 된다. 둘 사이의 신뢰적 위기는 소설 말미에 다시 마당에서 소년의 쇠공 소리가 들려오면서 새 국면을 맞는다.

“공이 지면에 쿵, 부딪칠 때마다 내 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이 깊고 과묵한 시간과 어둠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중략) 그것은 마치 내 힘의 크기 같아 보인다. 내가 보는 것이 현재다,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학습의 생’)

어떤 의미에서 소년의 쇠공은 ‘나’에게 예상치 않은 희망의 싹을 틔워준 씨앗일지도 모른다. 조경란은 섣불리 치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상흔과 더불어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인물들에게 예기치 않은 작은 싹을 틔워줄 뿐이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에서 감지되는 생의 기운은 오히려 절실하고 진실하다. 숨은 상처를 억지로 헤집지 않으면서 타인의 고독을 끌어안으려는 이 조심스러운 글쓰기는 우리 시대 단편 미학의 한 정점일지도 모른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