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火葬)을 해도 타지않고 남겨진 것들… ‘망치’
입력 2013-03-14 17:16
망치/원재훈 장편소설/작가세계
“척척 쇠판을 걷어낸 사내는 쇠절구에 뼈를 넣고 빻아대기 시작했다. 아버지 죽음의 입자가 점점 고와진다. 마치 밀가루처럼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지만, 뼈와 뼈 사이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쇠막대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쇠판을 60년간 품고 살아왔다.”(115쪽)
시인 원재훈(52)의 첫 장편 ‘망치’(작가세계)에선 글쓰기의 순도를 벼리는 대장장이의 망치소리가 들린다. 1988년 계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를 발표하며 등단한 시인에게 시로 못다 푼 정한이 따로 있었다는 말인가.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에서 그를 만났다.
“4년 전, 한국전쟁 참전 용사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오래 전에 원고를 불태웠던 기억이 나더군요. 타버린 원고를 발로 밟을 때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지요. 그건 내가 쓴 문장이었어요. 명사와 동사, 부사와 형용사, 마침표와 쉼표…. 그것은 막연히 이 세상을 떠돌던 이야기의 뼈였지요. 그 후로 벽제 화장터에서 이 뼈를 다시 만난 겁니다.”
‘아버지를 위한 레퀴엠’이란 부제의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바탕이 됐지만 전개방식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장례를 마친 1인칭 화자 ‘나’와 어머니의 대화 같은 게 그것. “아버지 머리에 상처가 있었어요.” “무슨 말이냐, 내가 니 아버지를 죽였단 말이냐?” “염장이가 망치 자국 같다고 하던데요?” “아니다. 아니야. 망치는 무슨.”
말끝을 흐리던 어머니의 진실은 어머니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대목에서 밝혀진다. 심장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남편은 어느 날 밤, 몰래 휴대전화 통화를 하다 들키고 만다. “이제 곧 갈 거야. 이렇게 전화해줘서 고마워. 이 사람아,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순애야, 순애야. 정말 미안하다.”(170쪽)
순애는 남편과 딴살림을 차린 여자의 이름. 그걸 엿들은 ‘나’는 실성한 듯 망치를 들고 와 휴대전화를 내리찍는 소동을 벌이고 그 와중에 남편은 이마에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한 것은 사인(死因) 자체가 아니라 아버지 이마에 남은 ‘망치 자국’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제 몸에 무수히 못을 때려 박는 망치를 갖고 태어난다는 그런 비유에서 말이다.
평범했던 부부 관계는 남편이 두 아들을 낳은 후 외도를 하면서 시작됐다. 개성 출신인 남편은 남한에 내려와 정착하지 못한 채 여러 여자를 만났고 급기야 딴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 ‘상민’마저 버젓이 호적에 올려놓았던 것. 게다가 임종 직전, 상민에게까지 유산을 물려준다.
“호적에 올라 있는 낯선 이름… 첫째 상원, 둘째 상기는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상민이라는 아이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얻은 아이란 말인가. 가슴속 깊은 곳에 울렁거리는 분노가 치밀었다.”(191쪽)
여기서 소설의 화자는 다시 아들인 ‘나’로 바뀌고 이제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임진강에 유골을 뿌릴 때, 배다른 자식인 상민이 참석해 ‘큰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다. ‘나’는 그때 불현듯 깨닫는다. 아버지의 몸속에 박혀 있는 쇠막대란 어쩌면 지상에 남겨진 자식이라는 것을. 이렇듯 한 사람의 인생엔 화장(火葬)을 해도 타지 않고 남겨지는 것이 있다.
한때 원망과 연민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문학이라는 유산을 덤으로 남기고 떠난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