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영화-‘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 아픈 역사 제주 4·3사건 스러져간 영혼들을 위해…
입력 2013-03-13 18:16
1948년 11월. 제주도 사람들은 ‘해안선 5㎞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여긴다’는 흉흉한 소문을 듣고 삼삼오오 모여 피난길에 오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디서부터 일어나고 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산속으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은 곧 돌아갈 생각으로 따뜻한 지슬(감자의 제주어)을 나눠먹으며 집에 두고 온 가축들이 굶주릴 걱정과 시집·장가가는 얘기 등으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지난 1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최고상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감독 오멸)는 제주 4·3사건 당시 무차별한 민간인 학살을 피해 산속 동굴로 들어간 주민들의 실제 이야기를 다뤘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벌어진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수만 명이 숨진 게 4·3사건이다.
비극의 시작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 반대다. 토벌대의 포위망을 피해 황급히 동굴로 들어간 마을 주민들이 갖고 나온 건 지슬이 전부다. 지슬은 주민들을 지켜주는 유일한 식량이자 희망이다. 마을 사람들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매개이기도 하다. 토벌대는 마을을 불사르고 동굴을 공격해오지만 주민들은 매운 고추를 태운 연기로 방어한다.
영화는 선량한 마을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토벌대의 만행을 리얼하게 재현한다. 폭행과 강간은 예사이고 방화와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희생자들의 아픔과 슬픔이 흑백 화면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제주의 오름 등을 배경으로 한 빼어난 영상은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나 예술사진 못지않다.
한국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다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겁지는 않다. 중간 중간에 유머러스한 장면을 배치했다. 마을 사람들이 토벌대를 피해 도망치면서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천진난만하다. 그렇기에 더욱 처절함이 더해진다. 슬픔과 유머가 절묘하게 공존하는 작품이라는 점에 선댄스영화제가 최고 점수를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오멸 감독의 5번째 작품으로 출연진 대부분이 제주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가 제주어이기 때문에 한글자막을 입혔다. 오 감독은 “제주 4·3사건의 재현보다는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치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찍었다”며 “시사회 때 관객들이 무장을 하고 오던데, 가벼운 마음으로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1일 개봉. 15세 관람가.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