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어린이 차별하는 사회
입력 2013-03-13 17:39
어린 남매들이 사립문 앞에서 어머니에게 인사한다. “엄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손을 잡고 씩씩하게 초등학교로 향한다. 보통 한 가정에서 두세 명이 등교한다. 어머니는 자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 두세 살 터울로 자녀 대여섯 명을 낳았던 1960년대의 등교 모습이 대개 이랬다.
학교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의 모든 책임은 맏이의 몫이다. 세 명이 등교할 때는 막내가 가운데에서 걷게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구도를 유지한다. 학교에 도착하면 맏이가 막내를 교실까지 바래다주고 자기 교실로 간다.
각 가정의 자녀들보다 큰 무리를 지어 등교하는 아이들이 있다. 보육원에 있는 고아(孤兒) 기아(棄兒) 미아(迷兒) 등이다. 이들의 입성은 꾀죄죄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 슬하에서 자란 아이들보다는 초라하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도 보육원생들이 다녔다. 학교에서는 한 학년에 보육원생이 여럿이라도 한 반에 몰아넣지 않았다. 가급적 반별로 나누려고 노력했다. 돌이켜 보면 같은 반에서 보육원생들끼리 뭉치지 말고, 각 반으로 흩어져 평범한 가정의 친구들과 어울리라고 배려한 것 같다. 자녀가 보육원생과 함께 교육받는 걸 반대한 학부모도 없었다. 함께 사는 지혜를 깨우치도록 한 것이리라.
지금은 그때보다 국가와 가정의 살림살이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그런데도 세상인심은 경제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오히려 야박하고 인색해졌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임대아파트 주민과 자녀를 홀대하는 뉴스를 종종 접한다. 서로 오가지 못하게 철조망 등으로 울타리를 치기도 한다.
최근 아파트 평수에 따라 반 편성을 한 유치원 기사까지 신문에 실렸다. 통원버스를 편하게 운영하려고 한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유치원은 해명했다. 그러나 이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학부모는 많지 않다. 대체로 아파트보다 작은 연립주택이나 다가구주택에 사는 어린이들은 어떻게 반을 나누겠다는 것인가.
지위고하와 재산규모에 따라 사람, 특히 어린이를 차별하면 안 된다. 그런 사회에는 미래가 없고 대통합은 요원할 뿐이다. 최빈국 아이들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한 탤런트 김혜자씨의 수필집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오래된미래)가 생각난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김씨의 고운 마음을 우리 사회가 본받기를 기대한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