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삶이 설교다

입력 2013-03-12 17:19


누가복음 6장 43~45절

비노바 바베가 쓴 ‘교육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간디의 제자로 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바베가 간디가 머물고 있는 아슈람(수행자 거처)에 있을 때 그곳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칠 교사를 면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전공이 어떻게 되시나요?” “농업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밭을 갈 줄 아시겠군요.” “아뇨, 갈지는 못해도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모 심는 건 하실 수 있나요?” “아뇨, 심지는 못해도 심는 걸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그럼 여기 있는 토마토로 주스 만드는 건 할 수 있겠지요?” “아뇨, 주스를 만들지는 못해도 주스 만드는 법을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자 바베는 큰 소리로 나무랐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선생님이 할 수 있는 게 뭐요?” “가르치는 일밖에는요.”

교계 TV나 신문에는 설교가 주를 이루고, 목회자들의 설교집 출간 또한 넘쳐납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매일 새벽과 주일, 수요 예배 그리고 금요 구역예배 및 행사에도 경건회 등을 통해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는 이렇게 많은데 한국교회는 왜 지탄의 대상이 될까요. 설교자는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고, 청중은 설교를 강연 정도로 치부해 듣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것으로 사람이 변화되고 구원받는다면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가장 낮고 작은 자로 이 땅에 우리 주님이 오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압니다. 나무는 열매로 표현됩니다(눅 6:44). 말이 아니라 삶이 설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필요한 지도자는 설교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활이 건강하고 삶이 본이 돼 안팎이 토마토처럼 한결같은 지도자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설교자의 존재 그 자체가 교육이 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스승 되신 주님은 요한복음에 일곱 차례 자기 계시를 하시는데 언제나 말씀과 표적이 함께 이어집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권위와 능력이 있었던 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이 한국교회 위기를 말하면서도 본인은 위기를 만든 장본인이 아니라 피해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비난받는 교회가 되도록 해놓고도 그에 대한 일말의 책무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동화입니다. 수탉이 밀알 하나를 발견하고는 이 밀알을 누가 심겠느냐고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모였던 닭들은 다 흩어집니다. 수탉은 밀알을 고이 땅에 심어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정성껏 가꿉니다. 추수 때가 되어 다시 누가 낫으로 추수를 하고, 밀가루로 찧고, 빵을 만들 것인지 정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수탉이 이 일을 해 빵을 만들어 식탁에 차려놓고 누가 먹을 것인지 묻자 모든 닭이 달려듭니다. 그러자 수탉이 말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은 자는 빵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지금 우리는 비난의 자리를 피하지 않고 내 탓으로 돌릴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을 심는 수탉처럼 수고와 땀을 흘리기 위해 일터로 나가야 할 때입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경건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김종생 목사(KD한국교회희망봉사단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