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르완다 김보혜 선교사] (3) 좋은 환경서 왜 가난하게 사나

입력 2013-03-11 18:52


“배고파…” 자립 씨앗 삼으라고 준 염소마저 잡아먹어

한국 사람들이 이곳 르완다에서 최고로 꼽는 것이 ‘날씨’다. 남위 1도에 위치한 나라여서 한낮에는 좀 덥지만 대체로는 초가을처럼 쾌청하다. 해발 1500m 이상 고지대에 위치한 지형적 유리함에서 오는 축복인 듯하다. 르완다를 비롯해 자연환경이 좋은 동아프리카의 나라들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왜 가난하게 살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자연 조건이 좋으면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치열해지지 않기 때문일까.

특히 한국전쟁 이후 혹독한 겨울 추위와 끔찍한 가난을 극복한 한국인 입장에서 이 푸른 초록의 산천에서 배가 고프다고 우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절대 기아’는 르완다에 없다. 훔쳐먹을 것조차 없는 환경을 절대 기아라고 하면 늘 푸른 산허리에 아보카도와 바나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땅에서는 감자와 고구마, 카사바가 자라는 이곳에서 ‘배가 고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는 이들이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다. 원조에 묻혀 살다보니 의식 속에 기아라는 인식이 깊이 새겨진 때문이 아닐까.

르완다 경제는 정치적 이유로 최근 원조가 단절되는 등 여러모로 압박을 겪고 있어 좋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7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 몇 년 동안 키니냐의 에이즈 가정들과 피그미 빌리지에 지속적으로 구제를 하다 보니 발전상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2011년 10월 이후 작은 키인데도 허리조차 제대로 펼 수 없었던 피그미의 움막집은 르완다에서 사라졌다. 비록 여전한 흙집이지만 번듯한 함석지붕을 덮어 똑바로 서도 한참 높은 지붕을 가졌으니 이제 고대광실에 사는 셈이다.

2006년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늘 구부정하게 느릿느릿 걷는 학생들에게 “답답하니 빠릿빠릿하게 다니라”고 다그쳤다. 그랬더니 배가 고파서 빨리 못 걷겠단다. 그래서 말씀과 더불어 빵도 나눠주게 됐는데, 너나없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누가 가장 배가 고픈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피그미 빌리지의 사람들, 그리고 에이즈 가정이란다. 그래서 무작정 빵을 300개씩 사서 빵 허리에 “Yesu aragukunda, Nanjye nuko(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도∼)”라는 라벨을 두른 뒤 택시를 빌려 산 속에 흩어져 있는 피그미 빌리지를 찾아가 나눠주기 시작했다.

키나지와 카나지의 피그미 빌리지를 찾아가 오늘의 양식으로 콩과 옥수수가루를 나누고, 내일을 위한 희망의 씨앗으로 염소도 나눠줬다. 잘 돌봐서 어느 날엔가는 송아지를 사고, 소를 사서 풍요로운 내일을 꿈꾸라고 단단히 당부했다.

그렇지만 미래는커녕 몇 달이 안 돼 그들의 뱃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염소들의 흔적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무감바지의 산 위 피그미 빌리지를 방문하고 돌아내려오는데 택시 뒤를 따르며 사탕과 빵을 달라고 여전히 손을 벌리고 달려오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바라보며 ‘임금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가난을 어쩌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빵 한 조각, 옥수수 가루 몇 킬로그램으로 뒤집어질 가난이 아닌데 어쩔 것이냐’하는 무력감으로 탄식하며 ‘내가 구제하러 여기 왔나’ ‘끝나지 않을 구제를 계속해야 할까’ 등의 고민으로 갈등했다. 그때 하나님께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는 말씀을 주셨다.

‘둥둥둥둥’ 북치는 소리가 전에 없이 무척 경쾌하고, 찬양 인도자가 명랑하니 오후 1시의 더위에 처져 있던 사람들의 찬양 소리가 커졌다. 키 크고, 웃는 모습이 좋은 아낙네 파스칼린이 화요일 에이즈 가정 모임에서 찬양을 인도하고 있었다. ‘한동안 안 보이던 그녀가 어쩐 일로 다시 보일까’ 의아했는데 배고픔 때문이었다. 그녀는 키니냐에서 좀 떨어진 곳에 개척한 냐비타레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에이즈 가정에 지원하는 생필품을 받기 위해 이 모임에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그녀의 출현으로 화요 모임에 생기가 생겨서 좋았는데, 지난달 유치원 건축 때문에 지방으로 가는 도중에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32세였던 그녀는 아빠 없는 세 아이만 남겨놓았다. 보통 사람들은 교통사고나 각종 질병 때문에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듯하지만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은 그 경계선을 밟고 살아가는 것 같다.

종종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는다. 그중 하나가 ‘이 나라에 에이즈 환자가 몇 퍼센트나 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암암리에 아프리카는 에이즈 환자들로 뒤덮여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프리카의 무절제한 생활윤리 탓도 있지만 르완다의 에이즈는 1994년 내전으로 인한 후유증의 하나다. 아프리카 내전은 종족 전쟁인 경우가 많고, 에이즈는 그 종족 전쟁 중 끔찍한 인종 청소의 도구가 되곤 한다. 다른 이유도 있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아빠 없는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답답해서 물었더니 너무 간단한 답변이 돌아왔다. “배가 고파서”라고 한다.

맨 처음 키니냐에서 에이즈 가정을 구제하며 집집마다 심방을 다닐 때는 전기가 가설된 집에 사는 가정이 거의 없었다. 전기가 경제 상황의 절대적 지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전기 가설과 더불어 경제 발전에 가속이 붙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겨울이 없는 나라여서인지 침 뱉은 흔적이 선명한 맨 흙바닥 위에 거적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밀짚 자리를 펴고 자는 사람들을 보며 처음에는 심리적 충격이 무척 컸다.

몇 달간 구제를 지속했더니 고마운 마음에서인지 하루는 소소마(콩, 수수, 옥수수가루로 만든 미숫가루와 같은 가루)를 따뜻한 물에 타서 주는데 ‘에이즈 가정에서 이런 걸 마셔도 되나’ ‘물은 깨끗한 걸로 끓였을까’ 하는 의구심과 망설임이 잠시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는 선교를 위해 소의 피와 오줌이 섞인 우유도 냉큼 마신다는데 나는 선교사다’라며 비장하게 순교라도 각오한 것처럼 벌컥 마셨다. 그 때를 생각하면 편견에 갇혔던 내가 민망하다. 한번은 에이즈·결핵 요양원에 심방 갔다가 결핵균에 감염돼 10개월간 약을 먹은 적도 있다.

자기 손바닥 안에 가득한 약을 먹어야 하는 유치원생 이자바요, 그 아이에게 천형의 유전자를 물려 준 베아트리스, 여자축구 선수가 되고 싶지만 조금 뛰고 나면 피곤이 몰려와 희망을 내려놓은 여중생 추추조, 겁에 질린 듯 큰 눈과 부러질 듯 가는 다리로 열심히 춤을 추며 찬양하는 초등학교 여학생 케빈, 무엇을 하건 지고는 못 살겠다고 리더십을 보이는 프랭크 등등 모두 에이즈라는 질병을 안고 살아가지만 또 모두와 별다름 없이 하루하루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매월 식용유, 기름, 쌀 등의 생필품을 지원하는데 성실히 살아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때때로 에이즈 가정이기 때문에 특별한 구제 혜택을 받게 되는 건 아닌지, 형평성이 결여된 것은 아닌지 해서 성경을 암송하고 쓰게 한다. 글을 모르는 아낙들이 제법 있어서 우리나라의 야학과 같은 것을 시작했지만 한 달 내내 성경 쓰기를 지속하기는 어려운지 그런 가정은 대부분 자녀들이 성경 쓰기를 하는 것 같다. 지원되는 생필품이 육체의 건강을 돕고, 누가 기록하건 매일 적는 성경 구절의 글자 수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삶 가운데 인식되길 소망한다.

콩나물시루에서 물 빠져나가듯 어쩌면 이런 구제가 끝도 없이 허무한 일 같지만 날마다 콩나물 자라듯 어디에선가 이들의 희망이 자라가기를 바란다. 가난한 자를 긍휼히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눈이 머무는 곳에 내 마음과 눈도 함께 있기를, 그리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기를.

김보혜 선교사 (르완다 페파교단 협력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