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라운지-정원교] 떠나는 원자바오 평가

입력 2013-03-10 19:23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가장 큰 덕목은 성실함이었다. 그가 공산당 중앙판공청(중판) 주임(1986∼1993년)으로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장쩌민(江澤民)에 이르는 3명의 총서기를 보좌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학생들을 만나는 자오쯔양과 함께 있었지만 장쩌민은 그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았다. 중판 주임으로서 당연한 직무 수행이었다며. 그가 중판 주임이었을 땐 중난하이(中南海·황실 정원 호수였지만 중국 최고 지도부 거주지를 지칭) 부근에 살면서 매일 새벽 중난하이를 한 바퀴 뛴 뒤 출근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함께 지난 10년 동안 ‘후·원 체제’의 한 축을 맡았던 원 총리가 이제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게 됐다. 그는 지난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전체회의에서 정부 업무보고를 마친 뒤 세 번 절하는 것으로 고별 무대를 떠났다.

원자바오는 톈진(天津)에서 가장 좋다는 난카이(南開)중학교(중·고교 과정)를 나왔다. 난카이는 두 명의 총리를 배출한 것을 커다란 자랑으로 여긴다. 다른 한 명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다. 그 뒤 베이징 지질대학 지질광산학과에 들어갔다. 난카이에서 성적이 뛰어나 베이징대나 칭화대에도 입학할 수 있었지만 굳이 이곳을 택했다.

그가 ‘무당파’로 총리까지 오른 자질은 학창시절과 서북지역 오지 간쑤(甘肅)성 생활에서 형성됐다. 그는 지질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간쑤성 지질국 소속으로 지질 탐사 등을 하면서 14년 동안 척박한 자연과 함께 지내야 했다.

‘원예예(爺爺·할아버지)’ ‘우리 곁(身邊)의 총리’…. 그는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서민 총리로 정계생활을 무난히 마감하는 듯했다. 그러나 일가 재산이 27억 달러(약 3조원)나 된다는 뉴욕타임스(NYT) 보도로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아들 사업을 못 막은 건 평생 한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위층 부패도 걸러내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중국에도 마련돼 있었다면 중국인들이 성공한 총리를 가질 수 있었을까. 원자바오의 언행에는 그를 ‘중국 최고 연기자’(반체제 작가 위제)라고만 보기에는 진실성이 더 담겨 있는 것 같다.

정원교 특파원 wkc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