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정기] “우리 아들 잡겠어요”

입력 2013-03-10 18:43


어머니의 말은 절실했다. 우리 아들을 잡는 것 같다고. 지난 2월 14일 모 라디오 6시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온 얘기였다. 21세기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우리 자식을 죽이는 것 같다는 고언의 전말은 이러했다. (그 어려운) 취업을 했다 해서 좋아라 부산에서 서울로 왔는데 아들이 야근과 밤샘근무에 치여 죽을 지경이라는 것. 무작위로 일반 시민의 세상 사는 단상을 인터뷰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필자가 느끼기에) 노동운동이나 근로기준법 차원의 고발이 아니었다.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생명을 잉태하고 아프게 낳아서 젖을 먹여 직립시키고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인내로 키우고 군대 간 아들을 밤을 설치며 그리워하다 면회 가서 삼겹살을 구워 먹이고 빠듯한 가계와 씨름하며 대학을 졸업시킨 엄마였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하고 대견한 자식을 보러 왔는데 새벽처럼 나가 새벽에 돌아오는 아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아, 우리 자식의 청춘이 실종되고 시들어 간다는 아픈 절규, 생명을 기른 모성이면 직감하는 보호본능이었다.

저녁과 밤의 여가를 돌려주자

젊은 직장인들에게 저녁과 밤을 돌려주자. 자기 인생을 음미하고 개발하는 여가시간을 보장하자. 노동에 대한 의무감이 내재되지 않은 자유시간을 향유케 해야 한다. 여가는 현대에 와서 가치를 인정받은 개념이 아니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도 여가는 명상, 사색, 철학, 지식추구, 토론을 통한 자기개발과 같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가치를 지닌 시간으로 여겨졌다. 로마시대에는 목욕탕, 옥외극장, 운동장, 공원, 경기장 등을 통한 공공 여가의 개념도 등장했다(켈리, ‘레저’). 공공 여가는 봉건 왕정제와 종교 권위에 대한 복종이 강요되던 중세 서구사회에서는 소극적인 경향을 띠고 소수의 자유로운 신분의 남자들에게 한정되었지만 종교개혁을 거치고 봉건주의의 쇠퇴, 산업혁명, 산업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 같은 사회 변화에 따라 일반 시민들도 참여하는 대중적인 개념이 되었다. 더욱이 삶의 질적인 면을 고려하는 현대로 오면서 여가는 복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됐다.

직장문화의 타성이 된 야근을 없애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타성은 익숙하고 원만하며 심지어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여겨지는 일종의 우상 같은 것이므로. 1982년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할 때 남북대치 상황에서 국가안보와 국민들의 밤길 안전을 염려하는 반대가 거셌다. 토요일 휴무제를 둘러싸고는 국가의 경제력 약화를 우려했다. 그러나 결국 ‘진작 그랬어야 했다’며 제한되었던 국민 기본권의 당연한 회복으로 환영받았다. 온갖 진통을 거쳤지만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지난 4일 46년 동안 해오던 밤샘근무제를 없앴다.

능동적 노동에서 창의력 나온다

우리 아들과 딸들을 구속하는 지나친 야근을 추방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회사를 배회하는 야근의 망령을 떨쳐야 한다. 습관적인 야근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빈국이었던 시절에 지상과제였던 가난구제로 임무를 마친 것이다. 이제 미래는 노동의 양적 지표가 아니라 창의력과 같은 질적 요소가 좌우한다. 자정을 넘겨 귀가하여 아침에 출근하는 기진맥진형 직장환경에서 창의력은 언감생심이다. 지시를 수행하는 수동적 노동을 넘어 개성과 소통을 살리는 능동적 노동이 필요하다.

타성적 야근으로 우리 딸과 아들을 타성의 노예로 만들지 말자. 신선한 몸과 정신의 소유자들의 낮과 밤을 모두 사무실에만 유폐하는 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지혜롭지 못하다. 타성은 노(no)라고 말할 줄 모르는 예스맨을 만들기 십상이다. 밤과 낮이라는 음양의 상호보완을 부정하는 야근이라는 통행금지를 풀어야 한다. 저녁과 밤의 여가를 돌려주어 백가쟁명의 창의력을 지닌 혁신자로 성장케 하자.

김정기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