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17) 교장 부임후 첫 실험 “가장 긴 점심시간을 주자”
입력 2013-03-10 17:10 수정 2013-03-10 20:23
2004년 여름, 대학 재단으로부터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장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교육학자로서 일선 학교현장을 경험하고 강의실로 돌아와 졸업 후 교사가 되기를 꿈꾸는 사범대학과 교육대학원 학생들에게 실제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했기 때문이다.
국제교육진흥원장 임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당시 공개채용을 통해 교육인적자원부 기관장이 되었기에 이임 인사를 하기 위해 안병영 장관을 만났다. “오 원장, 고등학교로 간다면서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어요.”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나에겐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장관님, 저는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 아니라 제게 찾아온 뜻밖의 행운을 놓치지 않기 위해 국제교육진흥원장에서 물러나기로 한 것입니다. 교육학을 강의하는 제가 잠시 교과서를 내려놓고 일선 학교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됩니다.”
2004년 8월 1일, 건대부고 교장으로 첫 출근을 했다. 학교 분위기 쇄신과 학교 발전을 위한 점검의 시간이 필요했다. 새로 구성된 부장 교사들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 교육부에서 공식일정을 잡아 주었고, 붉은 카펫이 깔린 교육부 대회의실에서 브리핑을 해주었다. 우리 일행에 대한 중국 교육부의 파격적인 대우는 내가 얼마 전까지 교육인적지원부 국제교육진흥원장으로 일하면서 주한 외교관들과 업무적인 교류를 한 덕분이었다. 다음해,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중국 저우지 교육부 장관이 공식 일정 가운데 시간을 내어 건대부고를 방문하기도 했다.
건대부고 교장으로 취임하고 조금 지났을 때였다. 점심시간이면 18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급식을 받기 위해 학년별로 줄을 서곤 했다. 길지 않은 점심시간에 전체 학년이 점심식사를 마쳐야 했고 전교생이 점심식사를 하고 나면 곧이어 5교시 수업 시작종소리가 울렸다. 교사와 학생 모두 빠듯하게 돌아가는 고등학교 생활에 여유를 주고 싶었다.
교사들과 의논 끝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점심시간을 시도했다. 식사 시간 30분에 자유시간 60분. 서울 시내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점심시간을 90분으로 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대학입시를 향해 한 시간이라도 더 공부를 시켜야 하는 상황에 학부모들의 반응은 어떨까 궁금했다. 점심시간이 길어진 이후 학교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나무 그늘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운동장에서 축구나 농구를 하고 체육관에서 탁구를 즐기는 학생들로 교내에 생기가 넘쳤다. 반면 갑작스레 길어진 점심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스러워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을 위해 별도의 프로그램개발이 필요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오케스트라 연주 탈춤공연 사물놀이 등을 마련해 준다면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고등학생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주고 문화공연을 향유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았다. 학생들의 점심식사가 끝나면 미8군 밴드가 교정 느티나무 아래서 공연을 시작했다. 학교현장의 근본적인 변화의 시작은 가정에서 학교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시큰둥하던 학생들이 부모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신나게 이야기한다는 점이었다.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활기를 찾고 즐거워지면서 건대부고의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