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3부)] 재벌기업 부정적 이미지만 부각… 기초통계조차 없어
입력 2013-03-10 18:04
‘가족기업 전문가’ 남영호 교수가 본 한국의 현주소
가족기업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나 정부 차원의 정책 지원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가족기업 전문가인 남영호(사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10일 “정책을 입안하려면 실태 조사가 우선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가족기업에 대한 기초통계조차 없는 실정”이라며 “기초 인프라가 구축이 안 돼 가족기업 연구자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희소하다”고 지적했다. 또 “중소기업청에서 가업승계를 담당하는 인력은 한 명뿐이고,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가업승계 지원센터를 열었지만 실질적인 가족기업 컨설팅을 시중은행들이 전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남 교수는 가족기업에 대한 정책지원이나 연구가 등한시되는 이유로 재벌기업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좋지 않은 점을 꼽았다. 오너 경영자의 독단 경영과 재산 상속 과정의 갈등 등 가족기업의 단점이 부각되면서 반기업 정서가 필요 이상으로 확산돼 관련 연구나 정책 지원을 꺼리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 교수는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자칫 한국 가족기업의 경쟁력마저 외국기업에 빼앗기는 결과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해외에서는 삼성, 현대차 등 우리나라의 재벌을 가족기업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한국의 대표적 가족기업이 어떻게 세계를 재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수 가족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관련 학계, 컨설턴트(공인회계사, 세무사 등), 가족기업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남 교수의 지론이다. 그는 또 장수 가족기업 등에 대한 현황 조사가 선행돼야 하며 미국의 ‘FFI(Family Firm Institute)’, 유럽의 ‘FBN(Family Business Network)’과 같은 전문 단체 설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FFI는 1986년에 창립한 단체로 학자, 컨설턴트, 그리고 기업체의 3자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세계적 전문 학술지인 ‘패밀리 비즈니스 리뷰(FBR)’를 발간하고 있다.
남 교수는 우선 우리나라 가족기업들이 독일 최고 부자인 할인마트 체인 알디의 소유주인 카를 알브레히트 가문이나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기업집단을 이끌고 있는 발렌베리 가문의 사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발렌베리 가문은 은행·전자·통신장비·방위산업 등 100여개 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5대째 오너경영을 이어가는 등 우리나라 재벌과 유사하지만 부의 세습이나 총수의 황제경영 등에 대한 비판을 듣지 않고 있다”며 “가족사명서와 사회공헌 활동 등 발렌베리 가문이 우리 재벌에 주는 교훈점이 많다”고 말했다. 가족기업 오너들이 정도경영과 훌륭한 기업문화를 정착시켜 이를 후대에 자랑스럽게 넘겨주는 것을 하나의 책무로 여겨야지만 황제경영, 족벌기업이란 불명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가족기업은 일반 기업이 겪는 어려움 이외에도 승계계획, 상속분쟁 갈등 관리 등 과제가 많은 만큼 비가족기업과 다른 가족이사회, 자문이사회, 가족회의의 개설 등을 고려하는 경영도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이 같은 노력을 통해 가족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구축된다면 부족한 관련 세법 및 정책을 재정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 교수는 가족기업들의 큰 고민 중 하나인 원활한 가업승계를 위해 상속·증여세 신탁제 도입을 제안했다. 신탁제는 상속·증여세의 납부를 주식·채권 등 유가증권으로 대체해 가칭 ‘가업승계진흥원’에 일정기간 신탁한 뒤 해당 기업이 고용·성장 등 일정요건을 갖추면 매년 신탁한 유가증권의 일부를 되돌려 주는 방안으로, 실질적 상속·증여세 감면 효과가 있다. 또 가업승계진흥원에서 중소기업 후계자들을 교육시키는 방안도 제시했다. 그러면서 남 교수는 “가치와 비전을 부모와 자식 모두 공유해 신뢰를 구축해야 원활한 승계가 이뤄질 수 있다”며 “가업은 부의 승계가 아닌 기업가정신과 책임의 승계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 남 교수는 재벌 총수들이 순환출자 구조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한다는 비판을 듣고 있는 것과 관련, “독일의 폭스바겐이나 미국의 포드 등 창업주 일가가 소유한 지분이 적어도 자회사 등에 대해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것은 ‘차등의결권’ 때문”이라며 “우리나라도 도입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장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