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② 가족기업, 히든챔피언의 중추

입력 2013-03-10 18:04


독일 베를린에서 지난 1월 만난 일자 노트나겔 독일연방상공회의소 무역담당 이사는 가족기업의 장점을 묻자 “주식시장에 상장된 대기업들의 단점을 역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상장된 대기업 전문 경영인의 경우 보통 3년인 계약기간 내 실적을 내야 하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경영을 하고, 때로는 구조조정도 단행한다. 이에 따라 고용유지가 쉽지 않을뿐더러 회사 내부도 수직적 관계가 고착화한 경우가 많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가족기업은 그 같은 부작용이 적다는 게 노트나겔 이사의 주장이다.

대표적인 독일 가족기업인 리탈사의 볼프람 에버하르트 이사 역시 이 같은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상장사처럼 주주가 주인이면 실적에 따라 경영자의 책임을 묻고 노동력이나 원가가 싼 곳으로 생산시설을 이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가족기업은 창업주와 직원의 신뢰 관계가 기업 존립의 기반이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실적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독일 가족기업은 장기적인 투자를 지향한다. 장기투자는 최고경영자(CEO)가 재임 기간이 길어 상당기간 경영전략이 지속될 수 있고, 자기자본이 충분히 확보돼야 한다는 전제가 충족될 때 가능하다. 가족기업이 대부분인 독일 중소기업은 평균 영업이익률이 7.7%로 5.8%에 불과한 대기업보다 높다. 이윤유보율과 자기자본율 역시 높아 외부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경기순환과 무관하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을 경영할 수 있으며, 전략적 차원의 기술혁신과 장기적 투자도 가능하게 된다. 실제 독일 가족기업은 자기자본 비율이 평균 40% 정도로 상장기업(29%)보다 높으며, 70% 이상의 기술개발 자금을 외부 지원 없이 스스로 충당하고 있다.

독일 가족기업의 또 다른 특징은 지역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어 창업자와 승계자가 지역사회에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기업의 70% 이상이 중소도시나 농촌에 소재하고 있다.

정지영 대우인터내셔널 구주지역본부장은 “지역사회 주민들의 상당수가 직원으로 있고, 자신도 지역사회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창업주나 승계자는 따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회공헌에 나설 수밖에 없다”며 “지역의 거리 명칭이 공장이나 기업 이름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고 소개했다.

노트나겔 이사도 “비록 고용주지만 지역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직원들과 상하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도도 강하고 고용주는 지역 주민들의 일자리 창출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지역사회의 터줏대감인 가족기업은 직업 훈련생의 83%를 수용, 양질의 숙련 인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또 기업이 소재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대학이나 연구소와 함께 공동 연구·개발(R&D)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정부 역시 가족기업이 중심이 된 산·학·연 공동연구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김평희 코트라 글로벌연수원장은 “독일 정부는 대학과 연구소가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의 의뢰를 받아 R&D 과제를 수행하는 경우 그 대학과 연구소에 R&D 자금을 집중적으로 지원한다. 특히 2개 이상의 공공 연구기관이나 4개 이상의 사업이 공동으로 기술개발 과제에 참여할 경우에는 우선적으로 지원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이 같은 혁신지원 정책은 부품이나 생산재, 중간재 등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독일 ‘히든챔피언’이 양산되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일 가족기업은 외부 차입 경영을 최소화하는 등 경제적 리스크를 회피하기 때문에 국민경제에 주는 위험 부담이 적다. 기업 파산에 관한 법률이 미국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엄격한 측면도 가족기업의 모험 경영을 줄이는 한 요인이다.

이처럼 가족기업들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가업승계에 대한 가족 구성원간 분쟁을 겪는 독일 가족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최근 들어 독일 가족기업이 외부의 전문경영인을 고용하는 사례가 늘면서 소유주와 경영자가 대립하고, 시장 개방으로 인해 가족기업들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현지 관계자들은 전했다.

귀터슬로 글·사진=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