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3부)] 진칸 밀레 회장 “100% 무차입… ‘항상 더 나은 것’이 핵심정신”
입력 2013-03-10 18:30
독일 중소기업의 95%는 가족기업이다. 기업 소유자가 직접 경영을 하며 다음 세대로 상속되는 독일 가족기업은 지배구조가 안정돼 있고, 주주 이익 극대화를 위한 단기 이윤 추구보다 장기 투자와 성과에 집중한다. 이 때문에 독일 중소기업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결정적 특징으로 가족기업을 꼽는 이들도 많다. 세계 최고 수준의 가전업체인 독일의 밀레(Miele) 역시 전형적인 가족기업이다. 공동 창업자인 밀레 가문과 진칸(Zinkann) 가문이 1899년 이후 4대째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매출 4조원대로 이미 중소기업 수준을 벗어난 세계적인 기업이지만 여전히 귀터슬로라는 소도시를 기반으로 가업 승계, 비상장, 차입경영 최소화, ‘Made in Germany’ 정책 등을 고집하고 있다.
지난 1월 귀터슬로의 밀레 본사에서 라인하르트 진칸(53) 밀레 회장을 만났다. 직원들이 가장 자주 오가는 본사 2층에 그것도 안이 다 들여다보이는 진칸 회장의 좁은 집무실이 인상적이었다.
진칸 회장은 밀레의 성장 비결로 품질경영, 무차입 경영 두 가지를 우선 꼽았다. 그는 “창업주 두 분은 제품에 ‘항상 더 나은 것(Forever better)’이란 문구를 새겼는데 고품질에 수명이 긴 제품을 만들자는 핵심 정신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다. 또 은행빚 없이 100% 우리 돈으로 기업을 운영해 왔다. 이 때문에 외부 간섭 없이 경영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평균 수명이 5년이 채 안되는 주식회사 최고경영자(CEO)의 경우 전임자와 다르게 하려고 경영 결정을 자주 바꾸지만 우리는 상장사처럼 단기 투자 수익을 기대하지 않으며 제품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사비를 털어 장기 투자를 해왔다”고 소개했다.
밀레가 독일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든 4대째 두 가문 공동경영을 성공적으로 이어온 것은 보완과 견제, 그리고 능력 있는 후계자 양성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칸 회장은 “나는 마케팅을 담당하고, 마르크스 밀레 공동회장은 기술 부문을 맡는 등 철저하게 역할이 분담돼 있지만 중요한 의사결정 때는 서로 견제하고 규제할 수 있다. 각자의 장점을 살려 분담했지만 서로 힘을 합칠 부분이 있으면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며 “서로 채워주고 서로 규제하는 게 공동경영의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밀레의 경우 한 세대를 거칠 때마다 한 집안이 독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술부문과 경영부문의 대표를 번갈아 맡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후계자인 CEO 선발 과정이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진칸 회장은 “가족 중 회사에 들어오고 싶으면 경영이나 기술 등 관련된 공부를 하고 한 가지 이상 외국어에 능통해야 한다. 나는 3개 언어에 능통하다. 또 밀레가 아닌 다른 기업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회사와 관계없는 외부 인사로 구성된 위원회의 인터뷰를 거쳐 적정성 여부를 평가받는다”고 소개했다.
진칸 회장의 아버지인 피터 진칸(85) 전 회장은 2004년 퇴임 후에도 여전히 매일 회사에 나와 직원들을 격려하고 회사 상황에 대해 묻고 있다. 진칸 회장은 “30년 후에 당신이 이곳에 오면 퇴임 후 아버지처럼 회사 상황을 꼬치꼬치 묻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가전업 외의 업종 진출 계획은.
“다른 업종의 업체들과 경쟁해서 최고가 될 수 없다면 하지 않는 게 옳다. 과거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부품, 주방기구 등에 뛰어든 적이 있다. 하지만 포기했다. 그 분야 최고가 될 수 없었고, 장기적으로 성장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독일 내 자체 생산(Made in Germany)을 고집하는 이유는.
“모터와 전기 제동장치 등 주력 부품은 100% 자체 생산을 하는데 관련 부품 납품업체가 두 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어야 한다. 문제가 있으면 바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밀레의 테마는 어떻게 싸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루마니아, 체코, 중국에도 생산 공장이 있긴 하지만 완성된 부품을 조립하는 역할에 그친다. 본사에서 품질과 생산과정을 일일이 감독하기 어려운 데다 품질을 만족할 만한 납품업체를 현지에서 찾기 힘든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제품들이 고가라는 지적이 있는데.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나 뉴욕의 트럼프 타워 등 랜드마크 건물들에 밀레 제품이 들어가 있다. 분양받을 사람들은 건물 내부설계보다 부엌에 있는 가전제품 등을 보고 구매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이미지를 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밀레 가전제품을 보고 최고급 건물이라는 이미지를 연상한다는 얘기다. 홍콩, 상하이 등 부동산 광고에도 밀레 제품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는 것도 마찬가지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만큼 밀제 제품은 최고의 성능과 서비스로 전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우리가 어디에 포커스를 둬야 할지 확실하게 답을 알려준다.”
-밀레 임직원 중 오래 근무한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다른 독일 기업과 마찬가지로 매년 학생을 교육시키고 그중 300명 정도를 채용한다. 밀레의 1만6000여 임직원 중 25년 이상 근속사원은 1만여명이며 이 중에는 50년이 넘은 직원도 있다. 심지어 3대, 4대째 대를 이어 근무하는 가정도 있다. 이직률은 거의 0%다. 근로자들은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오래된 숙련 근로자들의 경험은 밀레 제품의 품질 보증수표나 다름없다.”
-해고는.
“한번도 해고는 없었다. 금융위기인 2009년 이후로 인력이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더 늘었다.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포기하면 안 된다.”
-위기 상황은 없었나.
“창립 이후 110여년 동안 세계대전, 인플레이션 등 많은 위기가 있었다. 최근 유럽이 위기지만 우리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위기 때 경쟁자는 도태됐지만 우리는 안정적으로 성장해 왔다. 독립적이고 부채가 없는 경영을 유지한다면 위기라는 파도가 밀려와도 기업은 시장에 닻을 내린 것처럼 안정되게 운영된다. 또 오래 쓰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제품을 만든다면 소비자도 외면하지 않는다.”
-독일 정부의 기업 정책 평가는.
“솔직히 세금이 많다. 특히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뒤 전기요금이 크게 올라 힘들다. 독일 정부가 기업 친화정책을 펴고 있는 점은 맞는다. 상속세 역시 부담이다. 오는 9월 총선 이후 세제 관련 법안이 개정되길 희망한다. 가족기업의 경우 남는 돈의 상당 부분을 연구개발 등에 투자해야 하는데 세금이 많을 경우 투자 여력이 줄 수밖에 없다.”
귀터슬로=글·사진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