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양기호] 미·일동맹에만 매달리는 일본
입력 2013-03-10 17:51
지난 2월 22일 미국 워싱턴. 일본 아베(安倍) 총리가 미·일정상회담을 마친 뒤 특별강연회에서 “일본이 돌아왔다(Japan is Back)”고 선언한 것은 인상적이었다. 일본 민주당 정권하에서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으로 인한 양국간 갈등, 아시아를 중시한 동아시아공동체 주장으로 흔들렸던 미·일관계를 완전히 복원시킨 점을 새삼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작년 12월 총선거에서 미·일동맹 균열과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영토분쟁을 들면서 민주당의 ‘외교패배’를 수차례 비난한 바 있다.
일본 자민당과 보수정치가, 일본 외무성의 주류인맥, 요미우리와 산케이신문 등 우파언론이 신줏단지처럼 받들고 있는 미·일동맹은 언제나 그렇듯이, 위기 시 항상 회귀본능을 자극하는 안식처이자 방파제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나타났다. 1981년 5월, 당시 스즈키(鈴木) 총리가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후에 미·일동맹이 반드시 군사적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발언을 하자, 놀란 일본 외무성과 보수언론은 총리가 양국관계를 손상시켰다고 비난하였다.
미·일동맹의 장래를 둘러싸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1982년 11월 새로 취임한 나카소네(中曾根) 총리는 미국 정계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자 하였다. 아예 군사적 의미에서 소련에 강력히 대항할 수 있도록 일본열도를 ‘불침항모(不沈航母)’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소련의 반발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그 대가는 상당히 컸다. 극동지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소련잠수함을 감시하고자 미국제 대잠정찰기 P3C를 100대이상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패전 후 일본은 미국의 단독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천황제 존폐여부를 쥐고 있던 미국은 종주국, 일본은 평화헌법을 수용하는 등 종속적인 입장에 놓여 있었다.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고자 하였다. 일본 요시다(吉田) 총리는 적극적인 반공노선과 대미추종을 실천하면서 미국의 요구를 충실히 따랐다. 당시 연합국군총사령부(GHQ) 윌로비 장군은 일본내각 구성이나 차기 총리 인선에까지 개입하였다. 그는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가 인민전선을 미화했다고 해서 싫어할 정도로 반공주의자였다. 나중에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 총통의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독립하면서 동시에 미·일동맹을 체결하였다. 냉전기 주일미군은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일본을 방어하는 대신, 일본 내 군사기지를 사실상 무제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손에 넣었다. 자민당정권은 미·일동맹을 기반으로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이른바 보수본류를 형성해 왔다. 여기에는 친미성향의 보수정치가, 관료와 재계, 보수언론, 일본 외무성 등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일본을 참가시켜 정치, 경제, 군사면에서 양국관계를 강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2006년 당시 아베 총리와 아소(麻生) 외상은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를 잇는 ‘자유와 번영의 호’(the arc of freedom and prosperity)를 제창하여 대중국 방어망을 시사한 적이 있다. 최근 들어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이 격화되자, 아베 정권은 다시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면서 미·일동맹에 의존하려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 상황과 너무나 다르다. 냉전기도 아니고, 중국과 한국의 국력도 엄청나게 커졌다. 중·일 간 무역량은 2011년 약 3450억 달러로, 미·일 간 무역량의 약 1.7배에 달한다. 동북아 구도는 미·일동맹이 아닌 미·중 간 G2체제가 주요 국제질서로 자리 잡고 있다. 위안부문제와 역사인식에서 미국 민주당은 오히려 일본정부에 비판적이다. ‘일본이 돌아와도(Japan is Back)’, 미국이 양팔 벌려서 반겨줄 상황은 더 이상 아니다. 21세기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접맥된 미·일동맹의 진화가 요구되고 있다.
양기호(성공회대 교수·일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