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몬트리올의 코테네주 묘원
입력 2013-03-08 17:27
“마지막으로 신학대학원 동기생으로서 저는 고인(故人)의 영전에 이렇게 인사를 드리렵니다.” 지난 2월 13일 몬트리올의 코테네주(C멏te-des-Neiges) 묘원에서 있었던 장례예식은 이런 말과 함께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손수 지은 애가(哀歌)를 그의 영전에 바쳤다. “그대는 맑고 밝은 천사였습니다. 그대는 늘 웃음으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는 법이라 하지만, 그대의 때 이른 죽음 앞에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제 그대를 위한 영원의 문이 준비되었으니, 친구여, 안녕히 가세요. 우리는 그대에 대한 기억을 마음으로 간직할 터이니,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없는 그곳에서 영원히 안식하세요.” 불과 몇 개월 전에 몬트리올 감리교회의 고영우 목사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몬트리올 동창회를 자주 열자고 제안한 그가 이렇게 불현듯 세상을 떠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곳을 꼭 한번 들러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방문하다니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넓게 펼쳐진 몬트리올의 코테네주 묘원을 서서히 움직이는 승용차 안에서 최동환 장로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주(駐)몬트리올 총영사 겸 주(駐)국제민간항공기구의 대사다. 고인은 영사관 직원으로 업무를 보았던 것이다. “저도 몬트리올 대학 도서관을 드나들며 이곳에 한번 와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다니 뜻밖입니다.” 어느 덧 승용차는 코테네주 묘원의 화장장에 도착했고 여러 대에 분승한 유가족과 조문객이 차에서 내렸다. 코앞에 몬트리올 대학의 도서관이 덮칠 듯 시야에 들어찼다. 건장한 남자 여섯 명이 고인의 관을 운구해 내려놓았다. 우리는 영정사진과 화환으로 고인의 관을 장식했고 저마다 한 송이 꽃을 바치며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코테네주 묘원은 몬트리올 대학 사이에 불과 길 하나를 두고 있는데 대학보다 몇 곱절이나 더 큰 거대한 묘원이다. 2년 전 몬트리올에 첫발을 디뎠을 때에 이렇게 큰 묘지가 대학에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인구밀집지역에 있다는 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유럽의 도시들은 대개 도시 안 여러 곳에 작은 공동묘지들이 있다. 교회 내부에 돌로 된 석관을 안치해 놓은 경우도 있다. 언젠가 스위스 시골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적이 있는데 교회 앞마당이 비석으로 가득 찬 묘지였다. 우리 문화에서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과 격리돼 산에 묻히는 것이 일반이다. 하지만 서양 기독교 문화에서는 세상을 떠난 자들이 도시 안과 예배당 내부에 안치돼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도시를 차지해 왔다. 서양 사람들에게 있어 도시와 예배당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특이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육체적인 순교·영적인 순교
교회 내부를 처음으로 차지했던 유골은 박해 시대에 신앙을 고수했던 순교자들의 유골이다. 4세기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는 여러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교회’로 이장했다. ‘황금 입’을 가진 유명한 설교가 요안네스는 그리스도의 품 안에, 즉 교회 내부에 순교자들을 안치해야 한다고 힘주어 설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자들은 순교자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상속하곤 했고 이 경우 순교자들의 이름을 달고 있는 교회가 상속권을 가졌다. 이 시기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순교자들의 뼈 조각이 지옥의 형벌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순교자의 유골이 안치된 교회나 수도원 주변에 자신들의 묘지를 마련했다. 순교자들은 ‘보이지 않는 친구’였고 ‘소중한 친구’였던 것이다.
순교자들을 뒤이어 존경받던 자들은 수도자들이었다. 육체적 순교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난 후 수도자들은 영적인 순교자들로 여겨졌다. 446년 콘스탄티노플 부근에서 수도자 히파티오스(Hypatios)의 장례식이 있었다. ‘영적인 순교자’의 장례식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히파티오스가 입고 있던 수의 조각을 자르거나 시신을 감쌌던 장례용 천의 일부를 떼어내려고 했다. 심지어 히파티오스의 턱수염을 뽑는 자도 있었다. 턱수염이나 머리카락은 성유품(聖遺品)의 일환으로 소중히 간직되던 것이 이 시대의 정황이었다. 빗나간 열기는 더욱 가열됐고 중세 시대에 이르면 아기 예수가 놓여있던 지푸라기나 예수가 못 박힌 나무 십자가 조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들이 순례의 장소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육체적인 순교와 영적인 순교는 늘 서양의 장례문화를 이끈 쌍두마차였고 이런 정신적인 영향 아래에서 유럽의 도시 안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했던 것이다. 유럽의 도시 내부에 있던 대형묘지들이 혐오시설로 지탄받고 폐쇄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우리로선 묫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삶과 죽음은 오히려 영혼 안에 공존해야 할 것이다. 난쟁이 수도자였던 요안네스의 말이다. “이미 죽은 것처럼, 매일 죽음이 그대에게 가까이 이른 것처럼, 마치 무덤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라.”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