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랑케의 사관

입력 2013-03-08 18:04

엄밀한 사료 비판에 기초를 둬 근대 사학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독일의 랑케는 개신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든 시대는 신에 이어진다고 주장하며 역사가는 ‘본래 그것이 어떻게 있었는가’를 알리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른바 객관주의의 시조로 평가된다.

그러나 수천 년 또는 수백 년 지난 사실을 ‘과거의 모습 그대로’ 재생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승자의 기록이다시피 한 역사기록을 후대의 사학자가 제대로 밝혀내기란 정말 힘들다는 말이다. 보통 유능한 인물이 아니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문학과 달리 리얼리티라는 말보다는 사실(史實)이란 말을 즐겨 쓰고, 구성이란 말보다는 사관(史觀)이란 말을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역사가 추구하는 진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실제로 그렇다’라기보다는 역사가에게 선택된 사실들로 구성된 그 무엇에 불과할 수도 있다. 수집한 자료가 완벽하게 검증된 것이 아닌 바에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잉글랜드 중부 레스터 공영 주차장에서 지난해 9월 발굴된 유골이 법의학적 분석 끝에 폭군으로 알려진 리처드 3세인 것으로 확인됐다. 요크 왕조 마지막 왕으로 조카 에드워드 5세를 런던탑에 유폐시키고 왕위를 찬탈했다가 현재의 엘리자베스 여왕 가문인 튜더왕조를 연 리치먼드 백작 헨리와 싸우다 전사했다. 우리로 말하자면 조선시대 세조와 비슷한 왕이었다. 이 때문에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토머스 모어나 셰익스피어는 그를 괴물로 묘사했다.

놀라운 사실은 유골 조사 결과, 시신에 가해진 능욕과 난도질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것. 한 기록에 따르면 리처드 3세의 시신은 반라 상태였고, 아랫도리는 싸구려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고 뉴스위크는 전하고 있다. 발뼈는 사라지고 없었다. 고상한 품위를 자랑해온 영국 왕실로서는 체면 깎이는 일이 됐을 것이다.

역사란 이처럼 준엄한 것이다. 권력을 잡았다고 정적을 폄훼하다가는 후대에 더 큰 수치를 당할 수도 있다. 그나저나 랑케가 살아있다면 유골이 발견된 리처드 3세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빈민층의 옹호자였으며 자애로운 군주였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어 더욱 궁금하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