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18세기 英 상류층 자제들은 대학 포기하고 짐 쌌다… ‘그랜드 투어’

입력 2013-03-07 15:19 수정 2013-03-07 15:19


그랜드 투어/설혜심/웅진지식하우스

18세기 영국에선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 해외여행 열풍이 거셌다. 당시 영국 해협을 건너 대륙으로 오는 섬나라 귀족 자제들의 발길이 얼마나 거셌던지 ‘영국인의 대륙 침공’이라고 불렸을 정도. ‘그랜드 투어’라는 이름까지 붙었던 이 귀족 자제들의 트렌드는 그 자체가 엘리트 교육 코스이기도 했다.

이 책은 얼핏, 21세기 대한민국의 조기 유학과 유럽 여행 붐을 연상시키는 18세기 유럽의 여행 문화를 해부했다. 책은 흥미진진하다. 18세기 유럽 귀족 청년들의 여행 문화에 숨은 상류층의 욕망은 요즘의 한국 부유층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여행은 평균 2∼3년에 이르는 장기 여정이었으며 전체 여행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동행 교사가 있었다는 게 특징이다. 그랜드 투어는 공교육 불신의 산물이었다. 17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등 주요 대학이 실생활과 관련 없는 라틴어 고전이나 외게 하는 등 진부한 커리큘럼으로 급변하는 사회 수요에 대처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거셌다. 귀족층 사이에선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게 나은지, 홈 스쿨링을 하는 게 나은지 설전이 벌어질 만큼 대학 교육의 위상은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랜드 투어는 대안교육이 됐다. 여행 일정에는 당시 만개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로마 등지의 사설 아카데미 수학 코스가 필수로 들어갔다. 여기서 역사, 철학, 시, 수사학 등의 인문학 외에 승마 등 대학에선 배우기 힘든 교양도 쌓을 수 있었다. 이런 효과 덕분인지 영국에서 시작된 그랜드 투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9세기 초 미국으로 건너가 막을 내리기까지 100여년을 풍미했다.

그랜드 투어는 영국의 정치 경제적 안정과 번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국은 17세기 중반, 명예혁명으로 내치를 안정시킨 뒤 해상권을 장악해 무역대국으로 우뚝 서면서 소비의 시대에 들어섰다. 여행이 국가적 부를 필요조건으로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 같아 보인다.

책은 당시 오갔던 개인의 편지까지 추적해 18세기 여행 문화를 생생하게 복원한다. 포크와 나이프에서 이동용 목욕통까지 챙겼다는 여행 짐의 목록, 여행 지침서와 여행 에세이, 인기 여행코스까지 세심하게 챙겼다. 여행 가방만 878개가 된다는 기록도 있다. 사교와 외교의 도시 프랑스 파리와 르네상스 인문학의 요람 이탈리아 로마는 필수코스였다.

놀랍게도 우리가 아는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18세기 그랜드 투어의 세례를 받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무명학자였던 그는 한 귀족 자제의 여행 동행교사였는데, 여행 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쓴 ‘국부론’이 그에게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셈이 됐다. 그는 국부론에서 “영국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에 보내지 않고 외국에 여행시키는 것이 점점 하나의 습관으로 되어가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프랑스 시인 볼테르는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이 만나고자 했던 저명인사였다. 계몽사상가 디드로, 달랑베르 등이 볼테르를 찾았는데, 그들의 교류는 유럽 전역에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저자인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그랜드 투어: 신고전주의 열풍과 18세기 유럽의 예술기행’을 주제로 국제 심포지엄에서 강연을 했는데, 당시의 문화에서 오늘날의 조기 유학이나 해외여행과 비슷한 코드를 읽어내고 대중서의 옷을 입혀 이 책을 냈다.

18세기의 산물인 그랜드 투어가 어떻게 지금의 유럽연합(EU)과 같은 유럽의 동질성을 형성했는지, 그때 영국인들이 사 모은 컬렉션이 유럽의 예술과 건축을 어떻게 바꿨는지 등 서양 근대의 탄생 과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면서 대중서에만 함몰되지 않는 깊이도 갖췄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