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황태순] 왝 더 독(wag the dog)
입력 2013-03-07 17:27
오늘부터 국회가 열린다. 314회 임시회를 맞으며 문득 원주율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원주율 파이(π)를 누가 길게 외우는지 경쟁했다. 3.1415로 시작되는 파이는 무리수자 초월수다. 끝이 없다. 소수점 아래 1000번째 수까지만 표기한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상황이 그렇다. 여와 야, 청와대까지 뒤엉켜 밑도 끝도 없는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다.
‘왝 더 독(wag the dog)’, 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을 말한다. 요즘 주식시장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다. 우리 식으로는 ‘본말전도’ 정도가 될 것이다. 국제정치에서도 왝 더 독 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6·25 전쟁 때 철의 삼각지 전투다. 판문점에서 진행 중이던 정전협정에서 조금 더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려고, 뺏고 뺏기는 소모전을 벌였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열흘이 지났다. 당초 2월 14일까지 처리하기로 했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두고 3주가 넘게 여야가 강경대치하고 있다. 정부·여당과 야당은 지금 무엇을 위해서 이토록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까.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생소하기 짝이 없는 종합유선방송(SO) 관할권이 국정마비의 이유인지 말이다.
처음에는 명분 싸움인 줄 알았다. 여당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방송과 통신의 경계가 허물어진 방통융합시대에 새로운 일자리, 양질의 먹거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정보·통신·기술(ICT)을 한 부서에서 관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백번 타당하다. 더욱이 SO는 콘텐츠가 아니라 플랫폼 영역이라, 엄밀하게 말하면 방송사업자가 아니라 통신사업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야당의 항변에도 일리가 있다. 전체 가구의 80%가 넘는 1490만 가구가 SO를 통해 방송을 시청한다. 정보의 수도꼭지다. 꼭지만 쥐어틀면 정보의 흐름을 막을 수도 왜곡할 수도 있다. SO를 장악해서 여론형성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야당의 의구심이 전혀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대목이다. 여와 야의 명분 싸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기세 싸움인 줄 알았다. 갓 출범하는 새 정부로서는 습관적인 야당의 발목잡기에 초장부터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인 줄 알았다. 대선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야당은 선명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야 하는 절박한 입장에서 강수를 쓰는 줄 알았다. 그 정도면 이해해 줄 만하다. 적당히 샅바 싸움하다가 타협점을 찾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3월 4일 대통령이 직접 나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SO 관할권이 빠진 미래창조과학부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며, 절대 물러설 수 없다고 배수의 진을 쳤다. 대통령으로서는 본인의 신념인 ‘창조경제’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는, 그래서 국정표류까지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3월 6일 민주당도 긴급기자회견을 했다. 3대 조건(공영방송임원 추천 의결조건 강화, 방송청문회 개최, MBC 사장의 여야 검찰 고발)을 받아주면 SO와 IPTV(인터넷 TV) 사업 관할권을 인수위 원안대로 미래창조과학부로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왝 더 독이다. 야당이 당초 내세웠던 방송의 공공성과 공정성은 온데간데없고, 뜬금없이 정치권이 방송을 간섭하자고 하니 말이다.
지금은 양쪽 다 벼랑 끝에 서서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식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번거롭고 체면이 구겨지는 일이지만 우선 청문회를 통과한 장관들을 임명하고 국무회의도 열어야 한다.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내정자도 일단은 위기관리실장으로 발령하여 안보위기를 챙기게 해야 한다. 내가 먼저 할 일을 하면서 상대방의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
이제는 명분에서도 야당이 밀리는 형국이다. 왝 더 독의 밑천이 드러났으니 말이다. 그래도 국정운영의 최종적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결국 결과가 말하는 법이다. 국민들도 조금은 더 인내할 수 있다.
황태순(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