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진홍] 우고 차베스

입력 2013-03-07 17:26

#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이 팔리시오스 폰테 블랑코.’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베네수엘라는 물론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시몬 볼리바르의 전체 이름이다. 그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자랑이다. ‘해방자’ 또는 ‘국부(國父)’로 통한다. 베네수엘라의 바르가스주(州) 마이케티아에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이 있고, 수도 카라카스에 시몬 볼리바르 대학교가 있는 것도 그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다.

그는 스페인 식민지였던 베네수엘라를 1811년 해방시킨 데 이어 누에바그라나다(콜롬비아) 키토(에콰도르)를 연이어 해방시켜 ‘대(大)콜롬비아공화국’을 수립했다.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미국처럼 합중국이 돼야 한다는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대콜롬비아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어 독립을 쟁취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강력한 연대를 목표로 1826년 파나마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참가국들이 극심한 이견을 보이면서 대콜롬비아공화국마저 1830년 해체된다. 그는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거액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안도 거부했다. 그리곤 카리브 해안에 칩거하다 47세에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의학박사학위를 땄지만 과테말라로 이주한 뒤 혁명가로 변신한 체 게바라. 멕시코 망명 시절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 게릴라전을 통해 1959년 1월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고, 카스트로 정부에서 산업부 장관까지 지냈다. 6년 뒤 그는 쿠바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며 홀연히 아프리카 콩고로 가 혁명군을 지원했다. 그리곤 볼리비아 혁명에 참여했다가 정부군에 체포돼 39세에 총살당했다. “혁명은 다 익어 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는 등의 말을 남긴 그는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 2년여의 암투병 끝에 숨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친 주요 인물이 시몬 볼리바르와 체 게바라다. 차베스가 1982년 ‘혁명적 볼리바르 운동 200’이라는 그룹을 결성한 것과 라틴아메리카 통합을 꾸준히 추진한 점 등은 볼리바르와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대통령이 된 뒤 반미를 외치며 사회주의로의 대변혁을 추진한 데에는 체 게바라의 사상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부르는 이에 따라 영웅이 되기도 하고, 독재자 또는 돈키호테가 된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도 있고, 기뻐하는 이도 있다. 여느 지도자처럼 그도 공과(功過)가 있을 것 같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