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모래로 빚은 ‘시간의 흔적들’… 모래언덕 복원된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입력 2013-03-06 17:45
바람이 불 때마다 지형이 바뀌는 신두리 해안사구는 ‘바람의 땅’이다. 서해를 건너온 매서운 바닷바람이 파도에 밀려온 고운 모래를 육지로 실어 나른다. 무너지면 쌓고 또 무너지면 쌓고…. 아득한 태고 때부터 한줌씩 쌓아온 모래성이 거대한 모래언덕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형체 없는 바람이 그 모래언덕을 캔버스 삼아 물결무늬의 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한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에는 ‘한국의 사막’으로 불리는 이색적 풍경의 지형이 존재한다. 우리나라 최대의 해안사구로 길이 3.4㎞에 폭이 500m∼1.3㎞에 이르는 신두리 해안사구가 그 주인공으로 면적은 서울 여의도보다 조금 넓은 98만㎡. 썰물 때 광활한 갯벌이 드러나는 해변과 곰솔림 사이에 위치한 신두리 해안사구는 찾아가는 길도 이색적이다.
천리포수목원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북쪽의 학암포 해변 방향으로 달리다 중간쯤에서 곰솔림이 우거진 바닷가로 나가면 한여름 원색의 꿈을 간직한 신두리 해변이 펼쳐진다. 길이 3㎞에 폭이 200m인 신두리 해변은 자동차가 달릴 정도로 단단한 땅. 고현정과 김승우 주연의 영화 ‘해변의 여인’이 촬영됐던 곳으로 2007년 12월 7일에는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호의 원유유출 사고로 기름 범벅이 됐지만 지금은 그때의 상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끔히 치유됐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해안을 수놓은 이국적 풍경의 리조트와 펜션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1990년대까지 군사지역으로 묶인 덕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전된 신두리 해안사구는 사유지를 중심으로 숙박시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훼손의 길을 걷기 시작됐다. 급기야 개발이 안 된 북쪽 지역이 2001년 11월 30일에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구(砂丘)는 바람과 모래에 의해 만들어진 모래언덕을 말한다. 바람에 날려 온 씨앗이 척박한 모래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사구는 해당화를 비롯해 갯메꽃 갯완두 갯방풍 갯그령 갯쇠보리 산조풀 통보리사초 순비기나무 등 모두 29종의 희귀한 사구식물이 군락을 이룬 생명의 땅으로 거듭났다. 사구의 생명체는 식물만이 아니다.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언덕은 멸종 위기에 처한 금개구리와 왕소똥구리 개미지옥 표범장지뱀은 물론 해오라기 꼬마물떼새 쇠기러기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았다.
사구식물로 뒤덮여 초원처럼 보이던 신두리 해안사구가 사막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지난해 10월. 태안군이 사구의 본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모래언덕이 발달한 남쪽 지역 40만㎡에서 아까시나무 등 외래식물을 제거하고 모래언덕의 표면을 걷어냈다. 복원작업 직후 황량하던 모래언덕은 한겨울 매서운 북서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면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손바닥만한 사막도 없는 이곳에 어떻게 거대한 모래언덕이 생겼을까? 신두리는 지도에서 보면 북서쪽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겨울철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크게 받는 곳이다. 먼저 파도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신두리 해변에 쌓여 사빈으로 불리는 모래해안이 형성된다. 사빈의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는 겨울철 초속 17m가 넘는 강한 바람에 날려가다 모래언덕을 만든다. 그렇게 쌓이고 날아오고 또 쌓이고 날아오기를 1만5000년째.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의 ‘듄45’를 닮은 모래언덕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바람의 흔적으로 만들어진 물결무늬가 설치미술품을 자처한다.
복원된 모래언덕은 바다 반대편에서 볼 때 더욱 감동적이다. 발목 깊이로 푹푹 빠지는 모래언덕을 걸어 15m 높이의 급경사 언덕을 내려가면 웅장한 모래언덕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래언덕엔 어김없이 ‘바람의 땅’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운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인간의 족적 따위는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마법의 땅이라고나 할까.
푸른 하늘과 맞닿은 붉은 모래언덕의 능선은 청과 적의 경계이자 명과 암이 공존하는 공간. 태양이 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면 햇살에 젖은 모래언덕이 붉게 빛나고, 반원 형태의 모래언덕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탐방객들이 줄을 지어 모래언덕 능선을 걷는다. 호기심에 플라스틱 통을 타고 모래썰매를 즐기는 연인들의 감탄사도 모래언덕을 메아리친다.
신두리 해안사구에는 신기하게 습지도 공존한다. 멸종위기 종인 금개구리가 서식하는 두웅습지가 대표적이다. 두웅습지는 배후산지에서 유입된 물이 바닷물과의 밀도차로 인해 빠져나가지 못하고 사구지대의 모래톱 사이에 저장된 곳으로 담수의 양이 풍부하다. 물 한 방울 없는 아프리카의 사막과 다른 점이다. 이 때문에 두웅습지는 금개구리를 비롯해 맹꽁이 같은 양서류와 수서곤충의 산란지 역할을 한다.
모래언덕이 워낙 넓은데다 비슷비슷한 구릉이 많은 신두리 해안사구는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기도 쉽지 않다. 미로를 걷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사구 북쪽 끝엔 바다와 연결된 인공수로가 있고, 이 수로를 따라 탈색한 갈대밭이 펼쳐진다. ‘한국의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 젊은 연인들이 모래장난을 하며 구릉 사이로 사라지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
신두리 해안사구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해가 질 무렵. 신두리의 바다와 하늘, 그리고 모래언덕을 붉게 채색한 노을이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는 오월의 봄날처럼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태안=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