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13) 국내 교수 채용공고에 3만5000피트 상공서 기도를
입력 2013-03-04 17:01
미국에서 돈을 빌릴 곳도 없었지만 한국에서 돈을 보내줄 사람도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며칠이 지났다. 등록마감일이 다가오던 날,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도움을 청한 곳이 미국의 월드비전 본부였다. 전화번호를 뒤져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에 있는 월드비전 본부의 주소를 알아내어 그곳 회장님께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무니햄 회장님. 저는 한국에서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 유학을 온 학생입니다. 가난하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한국 월드비전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저는 꿈을 이루기 위해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아들을 에스코트해주는 조건으로 비행기 표를 얻어 미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실하게 공부한 덕분에 조교장학금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고 제가 다니는 대학의 등록금 규정이 바뀌어 학업을 중단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낯선 미국 땅에서 박사 과정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은 지금, 등록해야 할 1000달러를 도와주거나 빌려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청하오니 저의 어린 시절부터 도움을 준 월드비전이 풍요의 땅 미국에서 제 꿈이 좌절되지 않도록 내 인생에 한 번 더 징검다리를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나의 절박함이 전해졌나보다. 며칠 뒤 등기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위기의 순간에 징검다리를 놓아달라는 한국인 유학생의 간절한 편지에 회장님 사모님께서 격려의 편지와 함께 1000달러짜리 수표를 보내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니햄 회장께 보낸 편지는 신임 회장 테드 앵스트롬(Ted W. Engstrom) 박사가 읽어보고 1000달러 수표를 보내준 것이었다. 이제 고인이 된 앵스크롬 회장님과 격려편지를 보내주신 사모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등록금을 내기 전에 복사 가게에 들렀다. 그 소중한 수표를 복사했다. 수표를 등록금 창구에 내고 나면 절박한 순간의 흔적이 사라져 버릴까 싫어서였다. 유학시절 가장 절박한 순간인 마지막 학기에 도움을 받은 수표는 언젠가 어느 누구에겐가 돌려주어야 할 ‘마음의 빚’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고,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내 책상서랍에는 그때 복사해 놓은 수표가 들어있다.
박사학위 논문이 끝나갈 무렵, 내가 목표로 한 건국대학교에서 교수를 채용한다는 소식을 접했다.‘드디어 도전의 순간이 다가오는구나.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며 고생을 참았던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올까.’ 각종지원 서류와 논문들을 챙겨 건국대학교 교무처로 우송했다. 초조하게 몇 주를 보내던 무렵 전화가 왔다. 박사학위를 소지한 지원자 아홉 명 가운데 1차 서류 심사와 논문 실적 심사에서 세 명을 선발해 면접한다는 내용이었다.
면접을 보기 위해 신용카드 할부로 비행기표를 장만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심신이 피로했지만 무수한 상념이 떠올랐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기도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떼를 쓰는 것 같았지만 나에겐 절박한 기도였다.
“하나님! 제가 드리는 기도는 지난날 지상에서 하던 기도와 달리 3만5000 피트 상공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제껏 힘든 순간마다 도움을 청했던 기도가 어떤 것은 응답을 받고 어떤 것은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려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번에 실패하면 제게는 다시는 일어날 힘이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 목사님들은 말합니다.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그런데 지금 저는 도저히 그럴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들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