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12) 박사 과정 마지막 1학기 남기고 뜻밖 위기
입력 2013-03-03 17:21
1984년 1월 1일. 이른 아침 딱정벌레 모양의 폭스바겐 비틀에 기네스 기록에 도전하는 사람들처럼 이삿짐을 차곡차곡 실었다. 조그만 차에 19인치 컬러TV 이불 취사도구 등을 싣고, 뒤쪽 꽁무니에는 애들 자전거 두 대를 달았다. 그 작은 차에 네 식구가 탔다. 출발부터 눈 속을 벗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낡은 차를 밀어주던 시카고의 이웃 사람들을 뒤로하고 박사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플로리다로 향했다.
자동차들이 털털거리며 달리는 우리 자동차를 앞질러가면서 모두 웃었다.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사흘 만에 플로리다의 주도 탈라하시에 도착했다. 플로리다주립대학교 기혼자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플로리다의 생활은 기대 이상으로 순조롭고 잘 풀렸다. 학과에 배정된 예산이 남아 등록금을 보조받을 수 있었던 뜻밖의 횡재가 그랬고 미국에 온 뒤 처음으로 두 달 동안 돈버는 일을 하지 않고 학교와 집을 오가고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공부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인 여유도 누렸다.
하지만 돈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는 팔자를 타고나지 못한 내가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닥쳤다. 중국식당에서 일하는 아내의 벌이만으로 우리 식구의 생활을 꾸려나가기는 어려웠다. 탈라하시에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우리나라 도깨비시장처럼 쓰던 물건을 사고팔았다. 학교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일요일은 교회에 가야 하기에 토요일만 장사를 했다. 장사 경험이 생기자 다른 유학생과 함께 화물차를 빌려 차로 6시간이나 떨어진 항구도시 세인트피터즈버그에 가서 물건을 사오며 물건을 팔았다.
그러던 중 사범대학 부속 연구소에 조교 자리를 얻었다. 등록금이 해결됐고 급여도 받을 수 있으니 행운이었다. ‘해가 나있는 동안 풀을 말려라’라는 미국 속담처럼 이참에 모든 일을 정리하고 학업에만 열중해 가능한 한 빨리 공부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생활을 빨리 마무리하기 위해 여름방학에도 학점을 취득했다. 다행히 내가 물을 말리던 기간에는 비가 내리는 날도 구름이 끼는 날도 별로 없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필요한 것들을 넉넉히 채워주셨다.
이듬해 여름 박사과정에 필요한 모든 학점을 취득하고 내 일생에서 가장 힘겨웠던 박사학위 취득 종합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수요일 하루만 쉬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에 8시간씩 실시되었다. 이 시험에 합격해 한 달 뒤 구술시험을 보았다. 그렇게 종합시험에 합격해 박사학위 논문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 계획서가 논문 심사를 위해 구성된 교수단에게 승인받아야 비로소 논문을 쓰는 것이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전되었고 방학을 반납하고 계절학기 수강을 계속한 결과 1987년 1학기가 끝날 무렵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가면서 절박한 상황을 몇 번쯤은 겪게 마련이다. 학창시절 내내 가난을 운명처럼 달고 지내온 내가 가장 절박한 상황에 처한 것은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때였다.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연구조교를 하며 등록금을 면제받고 생활비 일부를 보조받아 근근이 유학생황을 꾸려가던 때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외국인이 조교를 할 경우 플로리다 출신 학생들에 준하는 등록금은 부담해야 하는 규정이 생긴 것이다.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1000달러 정도였다. 지금이라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 액수지만 그때 내게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