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푹 빠진 여자 복싱 8대기구 통합 챔피언 김주희 “준비 없이 은퇴하면 막막… 그래서 닥공해요”
						입력 2013-03-03 17:10  
					
				스승은 어린 제자의 장래까지 걱정했다. “은퇴하면 뭐 할래?” 딸 같은 제자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교수가 되고 싶어요.” 스승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공부 좀 더 하자.” 그렇게 거인체육관의 정문호(53) 관장과 세계 여자 프로복싱 사상 첫 8대 기구 통합 챔피언 김주희(27)는 함께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 동기인 사제는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이제 박사 과정도 함께 밟고 있다. “주희가 은퇴한 뒤에 교수가 되고 싶다니 도와 줘야죠. 지도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정 관장의 말이다.
챔프의 꿈을 이룬 사제
둘의 인연은 1999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소녀는 운동복을 찾아오라는 언니의 심부름을 받고 거인체육관을 찾았다. 거기서 한 중년 남자를 맞닥뜨렸다. 남자는 끼니를 제대로 못 챙겨 먹어 얼굴이 창백한 소녀를 보고 한마디 했다. “예쁘게 생겼네.” 소녀는 얼굴이 빨개져 달아났다. 그리고 한 달 반 뒤 다시 체육관을 찾았다. 소녀는 세계챔피언이 되고 싶었고, 남자는 세계챔피언을 키우고 싶었다. 김주희와 정 관장은 함께 챔피언의 꿈에 빠졌다. 할리우드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여자 복서 지망생 매기(힐러리 스웽크)와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세계챔피언을 꿈꿨던 정 관장. 고인이 된 그의 선친 정석재씨는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오른팔이었다.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프로모터를 한 정석재씨는 세 아들 중 막내인 정 관장까지 복싱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불호령을 내렸다. 세계챔피언을 꿈꾸던 정 관장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경희대 1학년 때 글러브를 벗었다. 정 관장은 김주희를 통해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세계챔피언을 꿈꾸던 김주희. 꿈은 아름다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구두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외환위기 때 실업자가 된 뒤 치매에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현실을 비관하던 김주희에게 정 관장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면 복싱을 안 했을 것이고, 그럼 세계챔피언도 못 된다”며 다독였다. 김주희는 정 관장의 말을 듣고 더 이상 가정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면 무서운 힘이 나온다. 김주희는 연전연승으로 2004년 18세의 나이에 세계 최연소 챔피언에 올랐다.
동문이 된 사제
김주희의 세계챔피언 꿈을 이뤄 준 정 관장은 이제 김주희의 또 다른 꿈을 이뤄 주려 한다. 예전에 경희대를 졸업한 정 관장은 김주희와 함께 중부대 엔터테인먼트학과 학사 과정과 인문산업대학원 교육학과 석사 과정을 밟았다. 이어 지난해 3월엔 김주희와 나란히 같은 대학 인문산업대학원에 입학해 교육행정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김주희가 털어놓은 에피소드 한 가지. “대학 다닐 때 학과 동기들이 한동안 관장님이 학생인 줄 몰랐대요. 제 스케줄을 챙기기 위해 그저 저와 동행한 줄 알고 있더라고요. 호호호….”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졸업할 때 학과에서 한 명에게 상을 주는데, 세계챔피언인 제가 받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관장님이 그 상을 받는 게 아니겠어요. 살짝 실망했죠.” 김주희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정 관장에게 뒤늦게 다시 공부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 봤다. “제자의 공부를 보살피는 것도 지도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같이 공부하면 주희도 힘이 덜 들겠죠.” 친딸인들 이보다 더 살갑게 챙길 수 있을까?
“공부해라” 스승의 잔소리
‘관장님은 세계챔피언이 되라고 해놓고는 엉뚱한 주문을 해댔다. 권투 대신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잘 때린다고 권투를 잘하는 게 아니다”면서’. 김주희 자서전 ‘할 수 있다, 믿는다, 괜찮다’의 한 구절이다.
정 관장은 ‘권투선수는 무식하다’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고 했다. 그래서 어린 김주희에게 성적이 떨어지면 체육관에 올 생각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또 성적표도 가져오게 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세요? 책을 잃고 독후감을 써 오지 않으면 복싱을 못 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관장님이 사 주신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죠. 매년 50권쯤 읽은 것 같아요. 요즘 리포트를 작성하거나 강연 준비를 할 때 예전에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덕을 톡톡히 보고 있죠.” 김주희가 수다를 늘어놓았다. 정 관장이 ‘거 봐라’ 하는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김주희는 어떤 책을 읽었을까? “주로 관장님이 추천해 주신 책을 읽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삼국지’예요. 전 그런 책은 안 좋아하는데 읽으라고 하시니 읽을 수밖에요. ‘삼국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군사작전에 관한 책을 주실 땐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정 관장이 끼어들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전략과 전술이 복싱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읽으라고 한 거죠. 군사작전 책도 마찬가지고요.”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다정했다.
김주희가 밝힌 불만 한 가지. “제가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항상 성적은 관장님이 더 좋아요. 비슷한 수준의 과제를 제출해도 교수님은 관장님한테 더 점수를 잘 주시는 것 같아요.”
스승은 왜 제자에게 공부를 시키나
정 관장은 못 배운 복서들의 말로는 비참하다고 했다. “제 선친이 만든 신인왕전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지금 뭐 하고 있는 줄 아세요? 상당수가 공사판을 전전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다행이죠.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 복서는 떼인 돈을 받아 주는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강펀치를 자랑하던 다른 복서는 술집을 하고요. 다들 못 배워서 그런 겁니다.”
한때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정 관장은 운동선수도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꼭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반드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많이 배우고 또 영어도 잘해야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제자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키울 수 있어요.”
정 관장의 소원은 김주희가 은퇴 후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다. “대학교수가 링에 오른 적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복서가 대학 강단에 선 적은 없어요. 국내 프로복서 최초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주희가 교수가 되면 복서를 보는 사람들의 눈도 달라지겠죠.”
김주희가 돌연 숙연해졌다. “관장님을 못 만났더라면 챔피언 김주희는 없었을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책도 사 주시고, 몰래 수학여행비도 내 주셨죠. 학교에도 부모 대신 와 주시기도 했어요. 시험 때면 운동도 덜 시키셨죠.”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한텐 관장님이 아버지 같은 분이세요.”
챔프의 마지막 도전
8대 기구 통합 챔피언인 김주희는 마지막 도전에 나서려 하고 있다. “WBC(세계복싱평의회) 타이틀을 따고 싶어요. 물론 모험이죠. 자칫하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거든요. 너무 위험한 도박은 하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도 많아요. 그렇지만 모든 걸 걸고서라도 WBC 타이틀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현실에 안주하고 도전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김주희가 WBC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고 링 위에서 기도하는 날 인생 2막이 열릴 것이다. 나중에 어떤 교수가 되고 싶은지 묻자 김주희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학생을 돕는 멘토 같은 교수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김주희는 훈련을 위해 글러브 끈을 졸라매며 자신과 같은 운동선수들에게 이런 조언을 남겼다. “준비 없이 은퇴하면 막막하잖아요. 공부는 은퇴 후를 대비하는 보험이라고 생각해요. 힘들겠지만 평소 운동하듯이 매일 조금씩 꾸준히 공부하면 은퇴 후 진로를 정할 때 선택의 폭이 넓어집니다. 그러니까 닥공(닥치고 공부)하세요.”
글·사진=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