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봄의 전령사들
입력 2013-03-03 17:55
서울에서 올해 첫 황사가 관측되고 봄의 전령사인 복수초가 꽃을 피웠으니 봄이 오긴 왔나 보다. 봄이 왔는데 연휴 내내 두문불출 잠만 자는 게 어쩐지 죄 같아서 마트에 가서 냉이를 좀 사왔다. 향긋했다. 어릴 적 얼어붙은 땅을 뚫고 파릇파릇 냉이가 지천으로 올라오면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데도 손등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들판을 쏘다니곤 했었다. 호미로 냉이 주변을 깊게 파서 뿌리까지 캐내 흙을 탈탈 털고 향을 맡으면 그 냄새가 그렇게 향긋했더랬다.
어느 해인가는 냉이 캐러 가는 언니와 언니 친구들을 따라 나섰다가 냉이가 별로 없어서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에 골짜기 작은 웅덩이 얼음을 깨고 얼음장 아래서 동면하던 미꾸라지를 소쿠리 한가득 잡아온 기억도 있다. 그해 봄은 냉잇국 대신 미꾸라짓국을 실컷 먹었더랬다. 그 후 언니는 은행원에게 시집갔고 나만 혼자 시골집에 남게 됐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호미와 소쿠리를 들고 들판으로 나가 소쿠리 한가득 냉이를 캐는 일로 나만의 봄맞이를 시작하곤 했었다.
그렇게 소쿠리 가득 냉이를 캐다드리면 할머니는 찬장에 보관해두었던 콩가루를 냉이에 묻혀 보글보글 냉이된장찌개를 끓여주시곤 했다. 그 고소하고 향긋하던 할머니표 된장찌개처럼 맛이 깊지는 않았지만 냉이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뽀글뽀글 끓여 아침 밥상을 차렸더니 뭔가 제대로 봄을 맞이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냉이를 사러 마트에 가는 길에는 얼마 전 신문에서 읽은 칼럼 때문에 처음 알게 된 봄의 전령사 복수초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홍릉수목원에도 잠시 들렀다. 씨앗에서 싹을 틔운 뒤 6년이 지나야 겨우 꽃을 피운다니 황금잔처럼 노랗고 빛나는 그 꽃의 자태를 봐두지 않으면 올봄은 왠지 무효일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더랬다.
수목원에는 활짝 핀 복수초 꽃을 찍기 위해 비싸고 성능이 좋은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 틈을 비집고 나도 휴대전화에 몇 컷 담아왔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손으로 직접 캐고 내 마음으로 직접 느껴야 봄은 진정 봄이므로.
지난주 월요일에는 올해 새로 뽑은 신입사원의 대학 졸업식이 있었다.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이제 막 시작되는 봄의 여신 같은 모습을 훔쳐보면서 지나간 내 인생의 봄날을 떠올려본다. 그 봄은 지나갔으나 여전히 기억되고 있으니 그 봄은 아직 무효가 아니다!
안현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