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광복회 회원 “관심은 최소한의 도리” 아쉬움 토로
						입력 2013-03-01 17:57  
					
				이만도(1842∼1910)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자 선생은 을사5적의 처벌을 주장했다. 이후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1910년 음식을 끊었고 단식 24일째 순국했다.
김법린(1899∼1964)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범어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 유학을 하며 피압박민족대회 한국대표로 활약하며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했다. 비밀결사 만당을 조직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지복영(1920∼2007) 선생은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해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며 대일항전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이들의 거룩한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광복은 더 늦춰졌을지 모른다.
국가보훈처는 1992년부터 매년 12명씩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이들의 공훈을 널리 알려 자라나는 세대에게 애국심을 심어주자는 취지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시민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3·1절을 앞둔 지난달 27일 서울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만난 시민들은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설명한 자료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역사관에는 ‘2월 독립 운동가’로 선정된 한상렬 선생을 소개한 6개의 대형 패널이 복도를 따라 전시돼 있었다. 그러나 오후에 3시간 동안 복도를 지나친 시민 200여명 중 소개 자료를 들여다본 시민은 10명도 채 안됐다. 대학생 이성영(23·여)씨는 “이곳에 전시된 고문 기구나 형무소 시설 등은 흥미로운데 독립운동가 소개 자료에는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학생 박준영(13)군은 “설명 자료가 다소 어려워 이해가 잘 안 된다”며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직원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적극 홍보하는 방안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도 문제 등이 불거질 때는 흥분하면서도 막상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한 광복회 관계자는 “매달 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학술 강연회와 기획사진전을 열고 있는데 홍보 효과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며 “다른 사업을 해보고 싶지만 지금은 예산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홍보 달력을 매년 5만∼6만부를 만들고 포스터도 매달 2만부를 제작해 지하철역이나 각 관공서, 학교 등에 게시하고 있다. 광복회는 선정된 독립운동가에 대한 학술 강연회도 열고 있지만 시민들은 무관심하다.
조경하 광복회 지회장은 “지난 20년 동안 선정된 이달의 독립운동가 260여명에 대해 제대로 아는 시민은 거의 없다”며 “독립운동가들은 조국 해방을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한 분들인데 그들의 이름도 모르는 건 최소한의 도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