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다시 3·1정신이다] 거대한 만세운동 물결… ‘기도’가 있었다

입력 2013-03-01 17:36


3·1운동 이끈 주요 교회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은 일제의 폭압에 저항해 교육·문화운동뿐 아니라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3·1운동의 깃발을 들었던 전국의 대표적인 교회를 중심으로 크리스천들의 숭고한 정신을 살펴본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평양 의주를 비롯한 6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시작됐다.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이날 태화관에 모여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했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었다.

1909년 서울 청계천에 세워진 수표교교회에서 시무했던 신석구 목사는 33인의 한 명으로 3·1운동에 가담해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이 교회에서 목회했던 오화영 정춘수 목사도 33인에 명단을 올렸다. 수표교교회는 1984년 서초동으로 이전했고, 교회 본당에 신 목사의 장손이 기증한 태극기와 교회기가 놓여 있다.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서울유형문화재 제130호)에선 청년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교회의 전신은 1893년 미국 북장로회의 사무엘 포맨 무어 선교사가 현재 롯데호텔 부근의 곤당골에 세운 예배당이다.

1919년 3월 5일 전북 군산시 구암교회에서는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기독교계 군산영광여중·고교 학생, 시민을 비롯해 500여명이 시가행진을 벌였다. 구암교회 건물은 2008년 3·1운동기념관으로 탈바꿈했다.

만세운동의 불길은 충청 강원 경남북 전남을 비롯한 지방 곳곳으로 번졌다.

전남 목포시 양동 양동교회(등록문화재 제114호)의 그리스도인들은 목포의 3·1운동이라 불리는 ‘4·8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양동교회가 세운 정명여학교의 교사 강석봉을 비롯한 교회 성도들은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호주장로교 선교회가 부산 좌천동에 설립한 부산진일신여학교(부산기념물 제55호)의 학생과 교사들은 부산·경남 지역에서 처음으로 3·1운동의 깃발을 들어올렸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제암리 학살’이다. 1919년 4월 초 경기도 수원군(현재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의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제암리교회 성도들은 적극 참여했다. 4월 15일 일제 검거반은 제암리교회에 주민들을 모이게 한 뒤 예배당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러 23명이 사망했다.

일제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진압 과정에서 3개월간 7500여명이 사망했고 4만6900여명이 구금됐으며 교회 47곳이 불탔다. 1906년 광주시 북문 안에 세워진 북문안교회는 교인들이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1919년 4월 1일 폐쇄됐다. 이후 광주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꿔 2001년 치평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는 1938년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는 등 기독교를 탄압했으나 이에 격렬히 저항한 순교자들이 적지 않았다. 경남 창원시 상남동 문창교회에서 1931∼36년 시무했던 주기철 목사는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일제로부터 설교 금지령을 받았고 수차례 투옥되다 1944년 감옥에서 순교했다. 이 교회의 이상소, 손덕우 장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