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요시다 고조] “독도·위안부 문제 거짓말하는 日정부 부끄러워… 회개위해 기도중”
입력 2013-03-01 17:37
서울일본인교회 요시다 고조 목사
“독도와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하고 있는 대표적인 거짓말입니다. 역사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일본 정부 당국자가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습니다.”
‘사죄와 화해의 선교사’로 32년간 한국서 활동한 서울일본인교회 요시다 고조(71) 목사는 독도와 위안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요시다 목사는 지난 21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 내내 일본 정부가 독도·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 사실대로 인정하고 속히 피해자에게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박근혜 정부가 역사 문제 해결을 기조로 삼고 한·일 관계를 풀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통상 거론된 ‘미래지향적 관계’란 표현을 또다시 일본 정부가 ‘과거사 외면’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반드시 역사 문제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과오 사죄와 민족간 화해를 위해 요시다 목사는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그는 양국간 역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총리와 간사장, 주한 일본대사관 등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신문 등 일본 언론에 기고문을 보내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역사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가 자국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다. 신앙대로 살기 위해 요시다 목사는 비난의 화살을 맞더라도 온몸으로 화평을 실천키로 결심했다. 그간 그를 비난하거나 협박하는 메일을 무수히 받았지만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역사를 알고서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나쁘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최근 일본 정치인들이 40대로 젊은 편인데, 이들이 한·일 관계 역사를 열심히 공부해 과오를 인정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무지(無知)도 죄가 된다는 걸 알아야 해요.”
가장 가까운 이웃이 여기 있다
1941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요시다 목사는 소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기독교를 접했다. 기독교인 이웃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된 그는 매주 주일학교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교회가 없어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사무엘, 에스더와 같은 성경 인물 이야기가 좋았던 그는 꾸준히 신앙생활을 했다.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중학생 때이다. 평소 일본에 교회와 기독교인이 적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세례를 받자마자 목회자가 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다짐했다. 4살 때 이사 온 나고야에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친 그는 도쿄기독교대학(TCU)에 진학해 그곳 인근 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불교와 일본 신도(神道)를 믿었지만 제가 목사가 된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당시 일본에서 교회는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곳으로 알려졌기에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았습니다. 집안형편 때문에 학비는 스스로 마련해야 했지만요.”
67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유년 시절을 보낸 나고야 모모야마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65년부터 기독교 라디오 방송인 태평양방송협회에서 전국 청취자에게 신앙 지도를 해왔고 전도사 시절부터 사역했던 도쿄의 교회도 있었지만 모두 사임했다. 모교회로 돌아가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고향에서 이웃 전도에 집중하던 요시다 목사가 한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976년 이화여대에서 열린 한·일청년세미나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목회자 자격으로 세미나에 참여한 그는 일본에선 전혀 알 수 없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이었다.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방문한 30여명의 일본 목회자와 청년들은 교회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기도를 했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참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은 거리상 가장 가까운 나라고 이웃 민족임에도 사랑은커녕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핍박했습니다. 직접 한 일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좁게 생각해 가족과 성도들, 믿지 않는 이웃들만 사랑하려 했습니다. 제암리교회 순교자를 생각하며 눈물로 회개기도를 하는 도중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게 아니겠어요. ‘일본에 가장 가까운 네 이웃이 여기 있다.’”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입니까
당시 그가 맡고 있던 나고야 모모야마 교회는 한창 성장 중이었다. 성도가 늘어 새 예배당을 짓고 교회 부설 유치원도 원생이 늘어 교실을 새로 마련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국을 다녀온 뒤 그의 머릿속은 한국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한국에서 사역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한국교회와 활발히 교류하던 모리야마 사토시 목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죄와 화해의 선교사로 한국에서 사역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아 도쿄에 계신 모리야마 목사님께 편지를 보낸 뒤, 이 사역을 위해 매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4년 뒤, 도쿄에서 서울일본인교회 목사로 와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바로 가겠다고 답했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사역이란 확신이 들었거든요.”
81년 요시다 목사는 가족과 함께 일본 초교파 선교단체인 ‘일한친선선교협력계’의 파송을 받고 서울일본인교회에 부임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곧 교회 성도들과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10여 년간 목회한 교회를 두고 위험한 분단국가로 떠나는 목사를 교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으로부터 ‘일본보다 춥고, 전쟁만 하는 조선에 가 무엇을 한다는 거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희생될까 우려하는 성도들도 많았고요. 역사를 잘 몰라서 나온 걱정이 많았지요. 사실 남북분단은 일본의 침략 때문에 생긴 것인데.”
재한일본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시작한 요시다 목사는 20여년 전부터 매월 헌금을 한국교회순교자유족회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보냈다. 일본 정부는 아니지만 적게나마 사죄하길 원하는 일본인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참회하러 왔다곤 하지만 저 역시 한국에 와서야 독도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구체적으로 알게 됐습니다. 한국에 와 보니 TV, 라디오, 신문 모두 이들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어요. 언론 보도와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얼마나 한국인들이 상처가 깊은지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사실과 다른 거짓말로 대응하고 있었어요. 부끄럽지만 일본인 대다수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어 보였고요.”
역사에 대한 무지가 양국의 화해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한 요시다 목사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일본군 위안부 평화비 논란, 독도 영유권 분쟁, 지도층의 망언 등 논란이 일 때마다 일본 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사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항의서한엔 주로 잘못된 역사관을 정정할 것과 한국인의 분노가 정당한 것임을 밝히는 내용이 담겼다.
“저는 일본 정부 관계자에게 오히려 묻고 싶어요. 당신들,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겁니까. 한일합병 이전까지 한국 관할에 있던 독도를 침략으로 강제 편입했음에도 다케시마 영유권을 주장합니까. 일본군이 운영한 위안소가 동남아시아 16개국에 250개나 존재했음에도 언제까지 민간단체가 했다고 거짓말할 겁니까. 10대 소녀들이 일본군의 성노예가 된 이후 미치광이가 되는 등 비극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평화비 철거를 요구하는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입니까. 한국에 30여 년간 몸담은 일본인으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물에 앞서 화해하라(마 5:24)
‘일본민족의 회개’를 교회 제1목표로 내세운 요시다 목사는 현재 50여명의 재한일본인과 한국인 성도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두 민족간 화해를 이룬 뒤 요시다 목사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아시아의 복음화’다. 그는 국민성이 정반대인 두 나라가 화해하고 교류·협력할 때 세계선교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 기대했다.
이를 위해 요시다 목사는 한국을 방문한 일본 목회자, 성도, 학생들에게 서대문형무소, 제암리교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설 등을 일주일간 소개하는 ‘한국스터디투어’를 진행한다. 역사 현장을 체험함으로써 일본인들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도록 돕기 위해서다. 이 투어에 참여해 요시다 목사의 삶을 보고 인생관과 진로를 바꾼 학생도 있다. 일례로 이웃 섬기는 일에 인생의 의미를 찾은 한 대학생은 ‘와세다봉사단체’라는 일본 비정부기구에 취업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우물을 파주고 있다.
보람도 크지만 어려움도 많다. 그가 일본 정부 관계자에게 항의서한을 보내고 언론에 글을 기고할 때마다 일본 우익단체 회원들이 단체로 항의메일을 보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디를 바꿔가며 같은 내용의 메일을 보내는 이들에게 일일이 답장을 보내기도 했지만 메일 수가 늘고 해킹 위험도 높아지면서 현재는 이메일 관리를 일본의 지인에게 맡긴 상태다. 그는 직접적인 테러 위협은 없다고 말했지만 인터뷰 당일도 관할 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교회에 다녀갔다.
한·일간 민감한 사안이 생길 때마다 언론 인터뷰에 나서야 하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언제까지 한국에서 이 일을 할 것인지 물었다.
“언론과의 인터뷰가 많아질수록 부담스럽고 간혹 문제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양국간 아무 문제가 없으면 기자들이 제게 오지 않겠지요. 마음은 무겁지만 이를 기회로 일본 사람들에게 독도와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알릴 수 있어 인터뷰 요청은 대부분 거절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한국에 살면서 일본의 기독교인과 양심세력을 깨우는 이 일을 계속할 계획입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