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빚
입력 2013-03-01 17:37
내가 장 가스쿠(Jean Gascou) 박사를 만나게 된 건 우연한 일이었다. 가스쿠 박사는 현재 파리 소르본의 파피루스 연구소 소장이다. 2003년 여름방학 나는 여느 때처럼 스트라스부르그대의 교부학연구소에서 논문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중년 부인이 내가 공부하던 교부학연구소에 책상을 마련하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2주간 자신이 일하는 연구소를 내부 수리하게 됐는데 그동안 잠시 우리 연구소로 옮겨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가르침의 빚
상근 직원이었던 그 여인 외에 어떤 학자도 우리 연구소를 드나들었다. 몇 차례 서로 지나쳐서 얼굴이 익게 되자 그분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내가 파코미오스 수도원에 대해 공부한다고 하자 흥미 있는 주제라고 하면서 그동안 썼던 논문을 좀 보자고 청했고 나는 300쪽 넘는 분량을 넘겨주었다. 며칠 뒤 그 학자는 파코미오스 수도회는 나일강에서 밀 수송을 하는 선단(船團)을 갖고 있었다고 슬쩍 귀띔해주었다. 밀을 수송하는 수도원 소유의 선단이라?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나는 직감적으로 내 연구에 무언가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파피루스 연구소를 드나들게 됐고 경제사 분야에 눈을 떠갔다. 알고 보니 그분은 스트라스부르그대의 파피루스 연구소 소장으로 고대 후기 로마경제사 분야의 거장인 장 가스쿠 박사였다. 또 행정요원이었던 중년 여인은 그의 부인이었다. 가스쿠 박사는 나를 만날 때마다 한두 개의 파피루스 자료를 아예 페이지째 펼쳐 보여주며 6∼7개월이나 도제식 교육을 계속했으며, 결국에는 나의 지도교수님 중 한 분이 됐다. 오늘날 내가 지속하고 있는 고대교회 경제사 분야의 연구는 전적으로 그분의 가르침에 빚진 것이다.
즐겨내는 자
며칠 전부터 나는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는 구절을 새삼스레 주목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즐겨내는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의 문화적 가르침에 빚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화권에 살았던 사도 바울이 특정한 그리스 전통에 빚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기원전 320년 크세노클레스라는 인물은 자신의 비용으로 케피소스 강에 견고한 대리석 다리를 건설했다. 기부자를 기념하는 비문에는 이런 시구가 남아 있다. ‘오, 초신자들이여, 데메테르(Demeter) 신의 성소로 가시오. 세찬 비가 쏟아져도 강물이 불어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곳으로 가시오. 크세노클레스(Xenocles)가 그대들을 위해 그 큰 강에 세운 다리가 얼마나 견고한지 보시오.’ 엘레우시스라는 도시의 데메테르 숭배는 그리스 전역에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런데 케피소스 강은 순례객의 안전을 위협했고, 때문에 크세노클레스는 그 강에 다리를 건설해 순례자들이 안전하게 엘레우시스로 갈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크세노클레스는 순례객의 안전을 위해 ‘즐겨내는 자’였던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즐겨내는 자’를 선행가(善行家·euergetes)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정치가들도 ‘즐겨내는 자들’이었다. 도시의 안전과 시민의 삶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이를 설명한 바 있다. “정치가들은 ‘공적인 일을 위한 기부(leitourgia)’를 반드시 행해야 한다. 공직에 들어올 때 관료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공공건물을 건축해야 한다. 그리하여 시민들이 (다리, 극장, 신전 등의) 기념건축물로 도시가 장식되는 것을 보고서 그런 정치체제가 지속되는 것을 기뻐하게끔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도시의 유지들도 자신들의 재산으로 기념이 될 만한 일을 행해야 한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6권 7절). 도시의 재력가나 정치가들은 도시와 시민을 위해 ‘즐겨내는 자들’이 됐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이런 그리스적 기부 전통을 생각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즐겨내는 자’가 되라고 권했던 것이다.
물질적인 빚
4세기에 시작된 수도자들의 복지사업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 문화에 빚진 결과다. 372년 수도자 출신의 감독인 바실리오스는 상속받은 막대한 양의 부동산을 처분해 카이사레아에 거대한 사회복지센터를 설립했다. 이렇게 하여 바실리오스는 그리스 표현으로 하면 선행가가 됐으며,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즐겨내는 자’가 됐다. 바실리오스가 설립한 사회복지센터의 한가운데에는 ‘기도의 집’(교회)이 있다. 교회 주변에는 성직자 숙소 등이 자리했고, 다음으로는 여행객을 위한 숙박시설, 노약자와 빈민을 위한 구제시설, 환자들을 돌보는 병동과 의사·간호사용 숙소가 위치했다. 더 바깥쪽에는 수도원, 다양한 수공기술을 가르치는 기술학교, 고아원 등도 자리했다.
물질적 빚은 가정도 사회도 나라도 망가트리지만 (정)의로운 빚은 개인도 사회도 나라도 살린다. 빚 권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지만 공의로운 전통에는 빚을 져야 한다는 것이 고대 기독교 역사의 가르침이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
◇‘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은 독자들의 요청으로 다시 매주 연재키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