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원폭피해자들은 지금] “방문자 98%가 일본인… 국내 무관심이 더 서러워”
입력 2013-02-28 19:43
“누가 얼굴 상처를 물으면 6·25전쟁 중에 다쳤다고 해요. 원자폭탄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하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지난 16일 찾아간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한국원폭피해자복지회관. 안월선(84) 할머니는 68년간 자신이 감내해 온 고통을 회상하며 사람들의 무관심에 서운함을 토로했다. 안 할머니는 지난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이 터지며 그 충격으로 얼굴에 깊은 흉터가 생겼다. 당시 16살이었던 할머니는 학교에 있다가 교사(校舍)가 무너지면서 그 아래 깔렸다.
수백 개의 유리 파편이 얼굴과 다리 등 온몸에 박혔고 30년이 넘도록 세 번의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할머니는 얼굴과 팔다리를 보여주면서 “평생 몸속에 박힌 유리만 빼며 살아온 것 같다”며 “한센병 환자라고 놀림까지 받으며 얼굴도 못 들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5남매 자녀 중 한 명의 딸은 원인 모를 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복지회관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10여명이 모여 TV를 보고 있었다. TV엔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방송이 나왔다. 노인들은 “북한이 어쩌자고 핵실험을 했는지 몰라. 저거 터지면 다 죽는다 다 죽어”라며 혀를 찼다.
김모(78) 할아버지는 “우리가 저런 핵폭탄에 맞은 것”이라며 “그런데 한국 정부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오히려 복지회관 방문자의 98%는 일본 사람이나 일본 시민단체”라며 안타까워했다.
복지회관은 지난 1996년 개관했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1세 중 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한 무료 양로시설로 현재 할아버지 30명과 할머니 80명 등 총 110명이 거주하고 있다. 노인들의 평균 나이는 78세. 자신들은 마지막 인생을 이곳에서 보낸다고 했다.
합천은 ‘제2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일제 강점기에 합천 주민들이 히로시마로 대거 이주해 살았기 때문에 원폭 피해도 컸다. 합천 주민들은 일제의 공출이 극심해지면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가족 단위로 일본행을 택했다. 현재 합천에는 원폭 피해자 1·2세를 합쳐 1000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626명이 1세대 노인들이다.
합천에서 원폭피해 2세들을 만나기는 힘들었다. 장애가 심해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상당수는 자신의 처지가 알려지는 것을 꺼려 인터뷰를 거부했다. 생계를 위해 전국을 떠돌며 일용직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렵사리 만난 원폭피해 2세대 진경숙(46)씨는 외조부모 쪽 피폭 영향이 대물림되고 있었다. 원폭 투하 당시 외할아버지는 출근길에, 이모는 학교에 가다가 사망했다. 당시 집에 머물다 피폭된 외할머니는 이후 평생 기관지성 질환으로 고생했다. 또 다른 이모 한 명은 결혼을 했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30대에 암으로 사망했다. 진씨도 19세 때부터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앓고 있다. 진씨 아들도 중학교 때부터 갑상선 수치가 높게 나오고 있다. 진씨의 동생은 갑상선염을, 둘째 동생의 딸은 소아당뇨를 앓고 있다.
진씨는 “피폭 당시 2달밖에 안 됐던 어머니는 평생 외할머니에 대한 분노를 갖고 살았다”며 “나 역시 피폭 영향이 두려워 자녀를 더 낳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진씨는 자신이 어릴 때에는 외가의 피폭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피폭의 유전성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고 밝혔다. 한정순 원폭2세환우회 회장은 “1세 피해자뿐만 아니라 2·3세들도 뇌성마비와 시력장애 등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린다”며 “원폭 투하 68년이 지나도록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여전히 우리가 피해를 먼저 알려야만 한다는 현실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합천=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