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운동의 성지 발길 줄잇는데 일제만행 유적은 초라 “제암리교회에 ‘그날의 역사’를 더 입혔으면…”

입력 2013-02-28 21:29


“너무 현대 것만 좋아하지 말고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살아온 것을 돌아보고 되새겨야 합니다.”

28일 경기도 화성 향남읍 제암리 제암교회에서 만난 강신범(72) 원로목사는 신앙인에게 역사교육이 갖는 의미를 이같이 설명했다. 제암교회의 전신은 제암리교회로, 1919년 4월 15일 일본에 의한 제암리 학살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화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일본 군경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예배당에 주민 23명(감리교인 12명, 천도교인 11명)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학살했다. 민족을 위해 피 흘린 기독교 민족운동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진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이덕주(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감신대 교수는 “제암리에 오면 기독교신앙이 민족상황과 별개일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고 말했다.

강신범 목사는 80년 제암교회로 부임해 32년간 시무하다 지난해 4월 은퇴했다. 첫 부임지에서 목회자 생활의 전부를 보낸 것이다. 계기는 82년 제암리 사건 희생자 유해 발굴이었다. 당시 강 목사는 생존자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임시로 묻혀 있던 유골들을 수습해 제암리교회 뒷동산에 합장했다. 강 목사는 “그때 전 할머니가 안 계셨다면 지금까지도 유골을 못 찾았을 것”이라며 “유해 발굴은 내 목회자 생활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유해 발굴 이후 2001년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건립됐으며 성역화사업으로 이 일대에 공원과 주차장 등이 조성됐다.

연간 1000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등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가정의 달인 5월에는 하루에만 교회 단체방문객 4∼5개 팀이 찾아와 북적인다고 한다. 28일 오전에도 교회에서 단체로 온 관람객이 40∼50명에 달했다. 이 중 서울에서 온 한 팀은 제암교회에서 강 목사의 특강을 들었다. 강 목사는 제암리 사건을 자세히 설명한 뒤 “앞서 가신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더듬어 살피는 이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조용한 다짐이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전시관 2곳과 시청각실, 23인 합동묘지, 23인 상징조형물, 3·1운동 순국기념탑, 3·1정신교육관 등으로 구성된 기념관은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지저분한 곳은 없었고 잔디 등의 관리상태도 양호했다.

다만 세련된 현대식 기념관을 만드는 데 집중해서인지 ‘옛 모습의 복원’이란 측면에는 소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94년 전 불타버린 초가 예배당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1절 기념식 때 제암리 사건을 재현하려고 임시로 얼기설기 만든 초가 예배당 모형만 주차장 한 구석에 있을 뿐이었다. 전시관에 사진자료와 사건 설명은 풍부한 편이지만 전시된 유물은 단추와 동전, 대못, 숯, 병·유리조각 등이 전부로 다소 빈약해보였다.

70년 일본 기독교인들이 보내온 속죄 헌금으로 지었던 예배당이 사진으로만 전시관에 남아 있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도쿄 니쇼대 세리카와 데츠요 교수는 이곳을 답사한 뒤 “조상의 죄를 사죄하는 의미에서 양심 있는 일본 기독교인들이 보내온 헌금으로 지은 예배당을 아예 없앤 것은 약간 섭섭하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이에 대해 “70년에 지은 예배당은 너무 낡아 비가 새고 벽이 갈라지는 등 그대로 둘 수 없는 지경이어서 일본 측과 합의 하에 2001년 헐고 다시 지었다”고 설명했다.

안전이나 편의상 불가피한 것들은 보수하고 정비하더라도 당시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역사의 현장을 최대한 생생히 보존하는 것이 후대에 바른 역사를 알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성=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