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우정과 수능 사이

입력 2013-02-28 19:57


며칠 전 아침, 뻑뻑해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친구의 페이스북 소식을 열어보았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에서 꽃보다 예쁘게 활짝 웃고 있는 갈래머리의 두 소녀. 반짝반짝 빛나는 그 모습에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두 소녀 옆에 쓰인 문구를 보는 순간, 이게 뭐야 싶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갈수록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부아가 돋았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공부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맑게 갠 하늘에 시커멓게 몰려든 먹구름 같은 이 문구를 작성한 것은 사교육 업체였다. 아이들의 우정을 노골적으로 비아냥대며 협박하는 어른들의 야비함에 아침부터 속에서 열불이 났다.

참 무책임하고 못난 어른들이다. 친구도 버리라고 아이들을 몰아쳐서 대학에 집어넣고 나면 그 다음은 어찌할 것인가. 친구는 대학에 들어가서 사귀어도 된다고? 청년실업 100만 시대에 취업전쟁이 입시전쟁보다 쉽다고 누가 그러던가. 그때 가선 또 ‘친구가 너의 스펙을 대신 쌓아주지 않는다’고 말할 텐가. 그런 식이면 일생이 전쟁이고 사방이 적이다. 그 속에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를 낳으면 입시지옥을 떠나 사람답게 살게 하겠다던 친구가 있었다. 자식에게 다양한 길을 보여주고 싶다던 그는 지금 서울에 살고 있고 그의 아이는 입시학원을 전전하며 한숨을 입에 달고 산다. 그의 ‘변절’에 설교를 늘어놓는 내게 친구는 말했다. 이게 현실이고 부모 마음이라고. 친구는 아이가 공부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듣기에는 아이의 한숨이 너무 깊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친구의 첫 마음이 변치 않았다면 아이는 한숨 쉬는 일 없이 즐기며 사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이라는 벽으로 수많은 가능성의 길을 막아놓고 오로지 대학만을 목표로 몰아가는 것은 어른들의 월권행위다. 언제까지 대학이 인생의 전부라고 강요할 것인가. 먼저 태어나 앞서 길을 나선 사람으로서 더 늦기 전에 다른 길도 있음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 전에 저 광고의 부당함을 이야기하고 아이들에게 사과부터 해야겠지만 말이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