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10) 전과목 성적 ‘A’ 받고 조교로… 월급 받으며 공부

입력 2013-02-27 17:07


하나님의 도움으로 등록금 문제가 해결된 후 고마운 학장님께 뭔가 보답해 드리고 싶었다. 장학금을 받을 만한 학생이었다는 것을 성적으로 보여드리고 싶었다. 일단 지난 학기보다 3학점 많은 12학점을 신청하고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불빛이 깜박일 무렵 집에 날아든 성적표에 A자 4개가 보기 좋게 찍혀 있었다. 전 과목 A학점을 받은 것이다. 성적표를 받던 날 학장님은 나를 미국 교육학계의 거장 월버그(Herbert J Walbeg) 박사에게 소개했고 월버그 박사는 나를 연구조교로 채용해주었다. 이로 인해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고 매달 700달러를 급여로 받게 됐다. 그때부터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 매달 100달러씩 보내드리는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조교로 임명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하던 날 아침이었다. 지도교수 연구실 바로 옆에 있는 조교 사무실 문을 열려는 순간 문에 붙은 내 이름을 발견했다. 문에는 나를 포함한 5명의 조교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 이름이 맨 위에 있었다. 알파벳 순서도 아니고 대학원 입학 순서도 아닌데 어떤 기준으로 내 이름을 맨 위에 붙여 놓았는지 궁금했다. 다른 조교에게 물었더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그건 일이 서투르고 적응이 필요한 신참을 격려하기 위한 교수님의 배려 때문이야. 너도 여기서 생활하다 보면 언젠가 다른 사람을 격려해줘야 할 때가 올 거야. 그때 다른 사람 이름을 네 이름 위에 붙여주도록 해.”

월버그 박사의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분에게 받은 감동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내 이름 위로 후배 조교 두 사람의 이름이 붙을 즈음, 교육학 학술지에 월버그 교수와 우리 조교들의 공동연구 논문이 게재되었다. 학술지를 받아봤을 때 미국 학술지에 내 이름이 처음 실렸다는 기쁨보다 당연히 맨 처음에 적혀 있어야 할 지도교수 이름이 우리 조교들 이름 중간에 끼어 있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컸다. 직위에 관계없이 그 논문을 시작해 마무리할 때까지 기여도가 큰 사람부터 이름이 게재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저 놀랍고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월버그 박사를 비롯한 교육학자들이 스탠퍼드 대학에서 학술발표회를 개최했을 때의 일이다. 발표와 토론이 자꾸 길어져 많이 지연되고 있었다. 월버그 박사가 내 자리로 다가와 단상으로 올라가 발표자나 토론자들이 정해진 시간을 초과하면 경고 종을 울려 달라고 주문했다. 발표회장 어딘가에 벽시계가 붙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단상에 올라갔는데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던 내게 그는 당신의 손목시계를 풀어 건네셨다. 그리고 얼마 후 크리스마스 시즌, 조교 사무실 내 책상에 카드 한 장과 조그만 선물상자가 놓여 있었다. 지난번 학술발표회장에서 당황스런 부탁을 해서 미안했다는 월버그 박사의 카드와 함께 당신이 차던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교육의 첫걸음은 학생들을 격려하는 것이라던 그분의 평범하지만 뜻 깊은 가르침은 언제나 따뜻한 마음과 섬세한 배려를 잃지 않고 제자를 감동시키는 스승의 모습 자체였다.

유학생활 중 가장 어려웠던 일은 아이들 문제였다. 시카고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할 무렵 딸아이 수정이가 세 살, 아들 경인이가 두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다. 나와 아내가 각각 학교와 직장에 가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맡길 곳이 필요했다. 다행히 수정이는 시카고한인봉사회가 시카고시의 재정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탁아소에 맡길 수 있었지만 경인이는 너무 어려 돈을 주고 개인 가정에 맡겨야 했다. 매일 아침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