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9) 장학금은 꿈도 못꿀 상황에 내앞에 다시 구세주가…

입력 2013-02-26 21:11


1981년 1월 4일. 미국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희뿌연 하늘에 눈발이 펄펄 날렸다. 앞으로 전개될 험난한 유학 생활의 전주곡 같았다. 비장한 각오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첫 학기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흡사 링 위에서 노련한 선수에게 얻어맞는 신출내기 권투선수 같았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코피가 줄줄 흘렀다.

시카고의 첫 겨울에는 한국에서 기대하던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등록금 내고 방을 얻고 남은 돈은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병과 함께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주일이면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건만 광화문 지하도 속에서 약속해 주셨던 하나님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1라운드가 끝나고 내게 날아든 성적표는 그야말로 부시시(B,C,C)했다. 유학 오기 전 미국 학생들은 매일 춤이나 추고 맥주나 마시며 연애나 하는 녀석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가난한 우리나라에서 등록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대학에 다녔는데 부자 나라인 미국에 와서 설마 등록금 걱정이야 하겠는가라고 내심 여유를 부린 게 사실이다. 그런 나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우선 수업방식이 한국과 너무나 달랐다. 한 과목을 수강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수업시간에는 주어진 토픽에 따라 논리 정연한 토의에 참가할 수 있어야 했다. 어려서부터 암기식 교육과 정답 찾기 훈련에 길들여진 내가 논리적 사고와 언어훈련이 잘 된 미국 학생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2학기가 문제였다. 장학금을 받거나 조교 자리를 얻어야 유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으련만 그 학점 가지고는 어디 가서 말도 꺼내지 못할 입장이 된 것이다. 여름방학동안 일자리를 구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근근이 먹고사는 문제나 해결할 정도일 뿐 등록금을 해결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노동허가서가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구질구질한 일들로 버텨가던 어느 날 이대로 포기하고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크나큰 모험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른 아침, 서둘러 사범대학 학장실을 찾았다. 학장님을 만나기 전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커닝 페이퍼 작성하듯 요점을 정리했다. 그의 출근을 기다리며 기도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며 수많은 기도를 해보았지만 그날의 기도를 난 평생 잊을 수 없다. 얼마 뒤 학장님이 출근하셨다.

“학장님, 전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 한국 최고의 장학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이제 보다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 대학에 유학을 왔는데 지금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그 순간 무너져 내리는 하늘 위에서 구세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샘, 부산에 가보았나요?” 그는 내 이름을 미국식으로 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부산은 왜 묻는단 말인가. 하긴 부산에 가보긴 했다. 신혼여행이랍시고 부산 자갈치시장에 가서 장어구이도 먹어보았다고 말했다. 구세주가 빙그레 웃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해군장교로 부산에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참으로 고맙게도 내가 대답하기 좋은 질문만 해주었다. “당신은 크리스천인가요?” 신바람이 난 나는 학장님을 만나기 위해 복도에서 기다리며 하나님에게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노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비서를 불러 장학금 신청서를 건네주라고 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