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개 ‘유물 파편’ 3년 걸려 복원 전시… 이스라엘 박물관 ‘헤롯대왕展’ 가다
입력 2013-02-26 17:20
헤롯대왕에 대한 관심이 이스라엘에서 고조되고 있다. BC 37년부터 AD4년까지 유대를 다스린 헤롯왕은 유대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나 잔혹한 유대인 탄압 등으로 유대인으로부터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등 논란의 한가운데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이달 중순 ‘헤롯대왕(Herod the Great)-왕의 마지막 여정’을 주제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헤롯왕 전시회를 개막했다.
오는 10월 5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에는 최근에 발굴된 헤롯왕 무덤과 여리고 등 헤롯과 관련된 여러 장소에서 나온 250여점의 고고학 발굴 유물을 900㎡의 공간에서 선을 보인다. 이번 전시회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헤롯왕 무덤의 복원된 묘실과 3개의 석관(石棺), 헤롯왕이 건설한 헤로디움 요새의 프레스코 조각그림, 키프로스(Cypros)에서 발견된 헤롯왕 개인 욕조, 이제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성전산의 조각된 돌, 아우구스투스가 선물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리석 대야 등이다. 박물관 측은 이번 전시회를 위해 전문가들을 동원, 30여t의 돌조각을 모아 3년여 동안 수백만개의 파편들을 복원했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박물관장인 제인스 스나이더는 “이스라엘 박물관이 지금까지 개최한 전시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고고학 전시회”라며 “이번 전시회 목적은 예루살렘 2성전 시대(BC 63년∼AD70년)에 유대 문화의 황금기를 가져오게 했던 헤롯왕의 독창성과 위대한 건축가이자 정치인 및 외교관이었던 그의 삶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조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는 유대 민족을 압제하기 위한 로마의 꼭두각시 왕이자 잔혹한 학살자, 악마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는 헤롯을 지나치게 관광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고 있다.
헤롯왕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 로마 군대와 최후 항전을 벌인 마사다 요새, 전천후 항구로 알려진 가이사랴, 유다 시대 가장 넓은 궁궐이자 별장이며 요새였던 헤로디움 등을 지으면서 건축광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2007년 처음으로 헤로디움 요새 발굴을 시작했으며 2010년 발굴 현장에서 추락해 사망한 히브리대학의 저명한 고고학자 에후드 네쩨르를 기리는 행사의 일환이라고 박물관 측은 말했다. 니르 바르카트 예루살렘 시장은 개막식에 참석해 “이번 전시회는 2000년전 예루살렘이 얼마나 중요한 장소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CNN은 개관에 앞서 지난해 말 큐레이터와 박물관장 인터뷰를 비롯해 준비 과정을 자세히 방송했다. 현지 영자신문인 예루살렘 포스트는 전시회와 관련, “헤롯에 관해 말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에 대해 사료적으로 절대 조망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한편 헤롯왕 전시회가 개막되면서 헤로디움 등 헤롯왕이 건설한 건축 관련 유적지에 대한 이스라엘 인들과 외국의 성지 순례객들의 방문도 잇따르고 있다.
◇헤로디움(Herodium)=예루살렘 남쪽 15㎞, 베들레헴 동쪽 5㎞의 유대 광야 가장자리에 있는 헤롯왕의 요새다. 헤롯왕의 무덤이 이곳서 발굴됐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 758m의 높은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산이었던 곳이 아니라 벌판에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그 안에 시설을 만든 것이다. 요새 안에는 궁전과 정원, 대형 수영장, 화려하게 장식된 목욕탕, 귀빈석을 갖춘 극장 등의 여가 시설이 갖추져 있다. 그렇지만 워낙 훼손이 많이 돼 현지 안내인의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으면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아직 발굴이 마무리되지 않은 탓인지 출입금지 구역이 많았다. 이민족 출신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있었던 헤롯왕은 늘 국민들로부터 불안감에 시달렸다.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암살을 시도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도피처를 여러 곳에 지었다. 헤로디움도 궁전의 역할을 겸한 일종의 도피 시설인 셈이다. 네쩨르 교수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이곳에서 헤롯왕의 유물을 발굴, 이번 전시회 토대를 마련했다.
◇마사다(Masada)=사해에서 서쪽으로 4㎞정도 떨어진 이곳 역시 헤롯왕이 만든 피난처다. 높이 410m의 산봉우리에 길이 600m, 너비 320m의 넓은 운동장 같은 평지에 여러 요새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헤롯왕과 신하들이 몇 년간 버틸 수 있는 물 저장탱크와 식량 창고 및 무기고가 있다. 그러나 헤롯왕은 이곳을 한번도 이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곳은 로마군들에게 끝까지 저항한 유대인 960명이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최후의 항전지로 유명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젊은층들은 뱀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요새를 찾는 트레킹을 즐기기도 한다.
◇가이사랴(Caesarea)=헤롯왕이 BC 22∼10년에 지중해 연안에 만든 도시다. 이스라엘 상업 중심 도시인 텔아비브에서 52㎞ 거리다. 도시 이름을 가이사랴로 한 것은 헤롯왕이 로마와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가이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헤롯왕의 유적지 중에 가장 규모가 웅장하고 튼튼하다. 원형 경기장은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지중해를 통해 로마와 직접 연결할 수 있도록 두개의 대형 방파제를 만들었다. 시설이 워낙 뛰어나 로마가 파송한 총독의 관저가 이곳에 있었으며 예수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 역시 이곳에 거주했다.
예루살렘=정진영 기자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