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출판] 회심이 변질되면서 신앙이 가벼워졌다… ‘회심의 변질’

입력 2013-02-26 17:16


회심의 변질/알렌 크라이더 지음/박삼종 등 옮김/대장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느 전문번역가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는 대번에 ‘회심의 본질’이라고 썼다. 한데, 그런 책이 없다는 거다. 그럴 리가 없다. 다시 보니 변질을 본질이라고 썼다. 변질을 본질로 읽은 거다. 어이없는 실수에 웃다가 씁쓸했다. 다 변해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회심이다. 변화도 아니고 변질이라니.

저자도 그랬을 것이다. 회심이 왜 타락하고 추락했는지가 궁금했나 보다. 하버드에서 초기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알렌 크라이더는 쉽게 읽히는 이 책에서 회심의 본질을 짚어주고, 변질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연어처럼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담한 시도를 단행한다.

저자에 따르면, 초대 교회는 신자가 되기 퍽 힘들었다. 아주 까다롭고 불친절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예컨대, 가난한 자를 돌보는지, 병든 자를 방문하는지, 나그네를 대접하고, 원수를 용서했는지를 체크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이웃에게 확인한 다음에야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였다. 시간도 꽤 걸렸다. 3년 동안, 성경과 신앙교리 문답 훈련을 받았다.

이건 숫제 믿지 말라는 투다. 이렇게 예수 믿는 것이 힘들면 누가 믿을까 싶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불일치를 각오하는 일이다. 돈과 권력에서 멀어지고 관계는 단절되고 소외당하기 일쑤이고,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처지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니, 본회퍼의 말마따나 와서 죽으라고 부르신 것이니 그런 값 지불은 당연하다.

더 믿기지 않는 것은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데도 갈수록 기독교인이 늘어만 갔다는 거다. 4세기 초까지 매 10년마다 평균 40%씩 성장했고, 로마의 인구 중 10%에 육박했다. 무서운 기세다.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신앙의 폭발적 성장은 경이롭다. 한국교회의 성장도 감히 견줄 수 없다. 그들은 믿는 대로 행동했고, 이것은 제국의 신민들에게는 의문을 자아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희망을 품으며 사는 것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그래서 꾸역꾸역 교회로 찾아왔던 것이다.

열린 예배니, 구도자 예배니 해서 누구나 교회에 쉽게 들어오게 하려는 일련의 움직임과 정반대다. 믿기 쉽게 하는 것이 신앙의 변질이고, 믿기 어렵게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어느 시대이고 예수 따르는 것이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이었던 적은 없다. 좁고 협착한 길이었다. 이토록 가벼워진 기독교가 가여워진 것은 헐거운 회심 때문인 것이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 크리스텐덤(Christendom)으로 번역된 기독교왕국 사회가 도래하면서 공적인 권력이 신앙을 강요하고, 특권과 이익을 노리고 교회 안으로 물밀 듯이 밀려온다. 그러자 깐깐한 회심의 과정이 축소되고 간소화되었다. 신자의 질이 저하되는 것을 불 보듯 뻔하다.

저자는 제대로 된 회심을 3B로 정의한다. 신념(Belief), 행동(Behavior), 소속(Belong)이다. 한마디로 회심은 변화이다. 삶의 총체적이고 전방위적 재구성이다. 그러니까 변화의 요구 없이 신자가 되고, 삶은 그대로인데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기독교 타락의 시발점이고 원인이기에 회심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절망이 읽힌다. ‘도대체 내가 예수를 믿기나 하는 걸까’라는 아득한 비관에 빠진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산다. 본서의 제목은 회심의 변화인데, 변질된 본질이 변화되고 회복 가능하다는 거다. 그러나 간단치 않다. 이 책을 읽게 되면 나와 같이 푸념하게 될 것이다. 내가 왜 이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읽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말이다.

김기현 목사 (로고스서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