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성낙] 삼일절, 제암리 교회가 안 보인다

입력 2013-02-25 18:40


“역사적 사실 알리는데 소홀해 잊히게 하는 것도 역사 인식에 대한 또 다른 폭거”

근래 일본이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행위를 지켜보는 우리의 심정은 몹시 불편하다. 일본이 과거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저지른 죄상에 대한 역사 인식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멀어 걱정이 되면서 화가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와서 그들의 과거 만행 현장을 보고 싶다고 하면 어디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더욱 당혹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번뜩 떠오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래전 우리나라를 찾은 일본 학생들이 과거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저지른 ‘제암리 교회 방화 학살 사건(提巖里敎會放火虐殺事件)’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사죄의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근래 필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제암리 교회’를 아는지 물어보곤 했다. 모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역사적인 독립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촉발된 범민족적 비폭력 항거 운동이 나라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맨손의 군중을 일본 병사들은 총칼로 잔인하게 진압했으며, 도처에서 집단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 만행 중 가장 잔혹한 사건으로 그해 4월 15일에 발생한 ‘제암리 교회 방화 학살 사건’을 꼽는다.

제암리 교회 방화 학살 사건은 수많은 사람을 교회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유인해 몰아넣고는 모든 창문과 출입구를 밖에서 못질해 잠그고, 교회 주변에 쌓아놓은 볏짚단에 불을 붙여 교회 안에 갇힌 자들을 모두 불태워 죽인 기획된 만행이다. 혹시라도 창밖으로 탈출한 사람은 주변을 삼엄하게 포위하고 있던 일본 병사들이 총으로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또 교회 안에 갇힌 가족을 구해보려고 애타게 몸부림치던 아낙네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는 점에서 악랄한 학살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제암리 교회는 우리 민족을 일제가 얼마나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했는지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수 있는 역사 교육 현장이기도 하다.

얼마 전 그 역사적인 제암리 교회를 찾아갔다. 도로 안내 표지판도 체계적이지 않을 뿐더러 역사 유적지로 교회와 기념관은 너무도 ‘현대식’ 건물이어서 오히려 초라해 보였다. 역사 유적지의 당당함이나 비통함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석조 기념추모탑만이 역사 유적지임을 외롭게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제암리 교회와 부속 건물에 자리한 역사기념관의 전시실은 일견 초라함 그 자체였다. 어두운 전시실 내에는 불길에 휩싸인 교회를 포위하고 총질하는 일본 병사들을 그린 벽화가 있었으나 왠지 어설퍼 보였다. 몇 점 안 되는 유물이 전시 유리 박스 안에 비치되어 있는데, 조화롭지도 않고 너무나 빈약해 부끄럽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즉, 오늘날의 제암리 교회는 일본 점령군이 그렇게도 잔인하게 저지른 교회 방화 학살 사건을 항변하려는 역사 교육 현장으로는 아주 미흡하며,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역사를 과장하거나 왜곡 포장해서는 결코 안 되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데 소홀히 하여 뭇 이야깃거리로 잊히게 하는 것도 역사 인식에 대한 또 다른 폭거가 아닌가 싶다.

몇 년 후면 일제강점기에서 우리 민족이 단결된 모습으로 용감하게 항거한 역사적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도 100년이 된다. 따라서 지금의 ‘제암리 유적지’가 강점기 일본 점령군이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는 역사 교육 현장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수준 높은 ‘제암리 복원 및 정비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그것이 국가가 힘이 없어서 보호하지 못해 무고하게 살해된 수많은 희생자의 영혼에 바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이며,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 민족이 당한 엄청난 수난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이를 상기시킬 수 있는 물리적, 시각적 유적지가 상대적으로 너무 왜소하고 소홀히 관리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새삼 묻게 된다.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