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8) ‘입양아’ 심부름 조건 美유학 항공권 얻어

입력 2013-02-25 21:29


1974년 11월 28일. 3년 가까이 복무한 군 생활이 끝났다. 제대하는 날 곧바로 서울대학교가 있던 동숭동에 갔다. 대학원 입학원서를 사기 위해서였다. 아무런 배경도 없고 경제적인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3년 가까운 군 생활을 마치고 받은 제대비 5000원으로 입학원서를 산 후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는 동두천으로 향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대학원 준비를 했었고 무난히 합격했다. 1975년 서울대 대학원의 입학금을 포함한 첫 학기 등록금은 8만3950원이었다. 등록금을 걱정하던 그때 정부정책으로 학자금 융자제도를 실시한다는 가뭄에 단비 같은 뉴스가 전해졌다. 같은 교회 집사님께서 보증을 서주어서 등록금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인생의 수많은 징검다리를 놓아주셨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입주 가정교사로 받은 돈으로 책을 사고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은행융자를 갚아나가기에 부족했다. 연체가 되자 나는 물론 보증인에게까지 독촉장이 날아들었다. 괴로운 일이었다. 대학원에서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될 무렵 다시 한국월드비전 장학금을 받게 됐다. 대학 4년간 받아온 월드비전 장학금을 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받은 것은 당시 월드비전 이윤재 회장님 덕분이다. 힘겨웠던 나의 대학 시절을 지켜보았던 그가 졸업과 동시에 찾아온 병마와 싸우는 동안에도 월드비전을 통해 치료받도록 도와주셨다. 대학원 공부를 계속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 내밀어준 도움의 손길이었다.

모교인 건국대 사범대학에서 조교 자리도 얻어 다소간 생활의 여유를 찾았다. 그렇게 석사학위를 받고 시간강사 신분이긴 하지만 대학 강단에도 섰다. 강의에 대한 설렘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고정 수입이 없었기에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때마침 정수장학회(당시 5·16장학회) 동창회의 간사를 맡으면서 고정 수입이 확보돼 미국 유학준비에 착수했다. 1년의 준비 끝에 드디어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대학교로부터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1980년 12월 중순이었다. 2주 뒤면 미국에서의 대학 학기가 시작되는데 생활비는커녕 비행기표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학생 비자를 받아들고 미국대사관을 나와 광화문 지하도를 힘없이 걷고 있을 때 갑자기 구약성서 창세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 그는 아들에게 질문을 받는다. “아버지 우리가 제사를 드리러 산에 가고 있는데 제사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지요?”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제사에 쓸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래 그거야. 내가 미국에 가서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그곳에 준비해 놓으실 것이다.’ 이 믿음만 간직하면 나의 유학 생활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학창시절 수많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던가. 어차피 빈손으로 시작한 인생 또 한번 부딪쳐보리라.

며칠 뒤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미국에 입양되는 아이들을 에스코트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홀트아동복지회를 찾았다. 두 아이는 하와이 공항까지, 세 아이는 로스앤젤레스(LA)까지 데려다 주는 조건으로 미국행 왕복 비행기표를 제공 받는 행운(?)을 잡았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