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휴식

입력 2013-02-24 17:32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랜 전통을 지닌 대학교가 있다. 그래서인지 슈퍼마켓이나 세탁소, 음식점 주인들 외에는 동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 대학에 다니고 있는 듯한 대학생들이다. 우리가 월세 들어 살고 있는 다세대주택도 총 7가구가 살고 있는데 우편함에 오는 우편물을 보고 추정하자면 절반 이상이 그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인 듯하다. 그중에는 어김없이 외국인 학생도 늘 한두 명 끼어 있곤 한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늘상 심심찮게 벌어지는 풍경이 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새로 이사 오는 풍경.

그러나 예전처럼 새로 이사 왔다고 이웃 간에 떡을 돌리며 인사를 하는 아름다운 풍습도 사라진 지 오래라 누가 새로 이사 왔는지 누가 이사 가는지 몇 년째 이곳에 살고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인사를 나눈 일은 없다. 다만 이사하면서 밖에 내놓은 대형 용량의 쓰레기봉투와 더러운 매트리스, 고장 난 컴퓨터 책상, 다리 부러진 의자, 깨진 거울 같은 망가진 가구들의 흔적을 보면서 짐작할 뿐이다.

며칠 전부터 대문 밖 전봇대 옆에 누군가 버리고 간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폐기물 스티커를 부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외국인 학생이 버리고 간 것인지 한쪽 다리가 부러진 그 의자는 며칠째 꼼짝도 하지 않고 담벼락에 기우뚱하게 기댄 그 자세 그대로다.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 놓여 있었다는 듯. 며칠 전 출근길에 보니 밤새 내린 눈이 하얗게 쌓인 그 의자 위에 길고양이 발자국이 찍혀있기도 했다. 일어나자마자 헐레벌떡 출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늦게야 퇴근하는 나로서야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폐기물 스티커를 발급하러 주민센터에 갈 여유도 없지만 며칠째 꼼짝도 하지 않고 놓여 있는 망가진 의자를 보면서 어젯밤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의자로서의 쓸모가 없어지고 나서야 너는 비록 버려졌지만 그 쓸모없음으로 자유롭게 휴식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주책없는 생각이지만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아픈 무릎을 돌볼 여유도 없이 출근하는 고단함이 그런 생각을 하게 했으리라.

누군가 예술이란 왜 아름다운가라고 물었을 때 누군가는 꽃이 아름다운 이유와 같다고 했다. 꽃은 밥이 아니고 꽃은 돈이 아니다. 그 쓸모없음이 꽃을 아름답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매일 아등바등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니 당분간 우리는 꽃이 아니다.

안현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