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맹경환] 친구가 아파하는 손톱 밑 가시
입력 2013-02-24 17:32
이달 초 고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정년퇴임을 앞두고 선후배들끼리 조촐하게 마련한 사은회 자리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손톱 밑 가시를 뽑아주겠다’고 하니 좀 나아지는 거냐”고 한마디 건넸다가 면박만 당했습니다. 직원이 100여명인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친구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며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친구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신문기자라는 사실을 잘 아는 친구는 혹시나 힘 있는 기관들의 괘씸죄에 걸릴까 조심스러워했습니다. 이렇게 지면에 등장할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씁니다.
친구는 잠깐 캐나다에 살았습니다. 가족과 멕시코 휴양지로 여행을 하려고 여행사 상품을 예약했는데 출발 전날 밤 취소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급하게 여행지를 바꾸느라 비싼 값에 여행을 다녀온 뒤 친구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재판 날 60대의 점잖은 판사는 친구가 영어에 능숙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는 질문도 천천히 하고 우리 돈으로 500만원짜리 소송이었지만 1시간 넘게 재판을 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하찮은 소송이었지만 이방인에 대한 배려에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한국 얘깁니다. 친구는 한국에서 한 중소기업을 인수했습니다. 전 경영진이 분식회계를 저지른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내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금융감독원의 조사를 거쳐 증권선물위원회의 최종 결정 자리에서 소명 기회를 어렵게 얻었답니다. 친구는 회사의 존폐가 걸린 일이라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위원들은 죄인 취급하며 한마디 하려고 해도 막았다고 합니다. ‘키코’라고 중소기업들이 환율 하락을 헤지하기 위해 가입했던 통화옵션 상품으로 100억원이 넘는 손실을 봤지만 하소연도 못했습니다.
금감원의 조사 과정도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수시로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면서도 여유 시간을 주지 않기 일쑤였습니다. 제출 기한 하루 전날에 통보한 적도 있답니다. 큰 기업들은 회사에 법무팀이 따로 있어 이런 일쯤은 쉽게 대응할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기업들은 다릅니다. 금감원이 요구한 자료를 준비하려면 회사의 핵심 인력들이 다 투입돼야 하고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랍니다.
은행에 대한 불만도 많았습니다. 키코 등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은 중소기업에 채권은행들은 ‘패스트 트랙’이라고 이자를 조금 높여 자금을 지원합니다. 하지만 정말 까다롭습니다. 3개월마다 만기를 연장해야 하고 그때마다 전 경영진의 보증을 세워야 했답니다. 매달 내는 2억원 넘는 이자도 힘들었지만 우습게도 전 경영진에게 사정사정 하는 일이 더 괴로웠다고 합니다.
박근혜 당선인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첫 회의를 주재하면서 언급한 ‘손톱 밑 가시’는 내내 회자되고 있습니다. 인수위는 지난 19일 한 달여 동안 노력한 결과 손톱 밑 가시 94개를 뽑았다고 발표했습니다. “맘만 먹으면 이렇게 한 달 만에 뽑을 수 있는 것들을 왜 이제야…”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손톱 밑 가시는 당사자들은 아파 괴롭지만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돼야 손톱 밑 가시가 보입니다.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만들겠다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합니다.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국민들의 마음을 그들의 입장에서 헤아리는 정부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그리고 친구처럼 해코지를 당할까 맘 놓고 할 말도 못하는 국민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친구가 바랐던 건 국가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맹경환 경제부 차장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