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교황 선출] 598년 만에 자진 사퇴 ‘후보만 117명’… ‘바티칸 주권자’ 예측 불허
입력 2013-02-23 00:23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 시몬 베드로의 후계자, 바티칸의 주권자(교황청 연감). 전 세계 가톨릭 신자 12억명의 영적 지도자인 교황을 수식하는 단어는 이처럼 다양하다. 하지만 세속 권력과 교권의 긴 다툼, 권력 찬탈을 위한 내부 암투 역시 끊이지 않았던 고난의 자리이기도 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8일 598년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 사임한다. 교황 선출 비밀회의 ‘콘클라베(Conclave)’도 다시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감금과 수난의 교황 선출 과정
교황 선출방식은 시대에 맞춰 변화돼 왔다. 초기엔 성직자, 신자들이 직접 교황을 뽑았고 4세기 무렵부턴 로마황제, 귀족, 독일 제왕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추기경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개혁파였던 교황 니콜라우스 2세가 1059년 교황선거법을 개정한 이후부터다.
교황 선출은 지난한 과정이었다. 시간 제한이 없었던 탓이다. 1241년 한여름 로마 귀족들은 새 교황을 빨리 뽑으라며 추기경들을 무너진 궁전에 감금했다. 외부에서 격리돼 교황을 뽑는 전통은 이때 시작됐다. 불볕더위 속에서 두 달 동안 계속된 회의 기간 중 추기경 한 명이 숨졌고, 새 교황 첼레스티노 4세도 후유증으로 2주 만에 선종했다.
1268년 추기경들은 로마 인근 비테르보 궁전에 모였지만 의견이 계속 엇갈렸다. 참다못한 주민들은 궁전에 들이는 음식을 크게 줄였고, 그래도 끝나지 않자 지붕을 뜯어버렸다. 새 교황 그레고리 10세가 선출된 것은 회의 시작 33개월만인 1271년이었다. 그동안 궁 안에서 추기경 2명이 숨졌다. 교황은 3년 뒤 ‘회의 시작 사흘이 지나면 추기경들에게 점심 저녁 중 한 끼만, 닷새가 지나면 빵과 물만 준다’는 콘클라베 칙령을 발표했다.
콘클라베는 ‘열쇠로 잠긴 방’이라는 뜻이다. 라틴어 ‘쿰(Cum·함께)’과 ‘클라비(Clavis·열쇠)’가 어원이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진행된다는 의미다. 교황령 ‘주님의 양떼’에는 콘클라베가 교황 선종 후 15∼20일 이내에 열려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전 세계 추기경들이 로마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다만 올해는 교황 사임이 예고된 데다 건강도 한층 악화돼 당초 일정보다 일찍 열릴 가능성이 높다.
은밀하지만 치열한 선거전
교황 선출은 80세 이하 추기경들이 모여 한 명을 선출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정해진 후보 없이 한 사람이 총 투표의 3분의 2를 얻을 때까지 계속된다. 20세기 이후 진행된 콘클라베의 평균 소요기간은 사흘이었다. 8년 전 콘클라베를 현장 취재했던 포린폴리시의 대니얼 윌리엄스는 22일 “누가 교황이 될지 예상하는 것은 도박”이라며 “올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추기경들은 콘클라베 첫날 오전 10시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미사를 연 뒤 오후 4시30분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간다. 첫날 오후에 이뤄지는 투표는 사실상 탐색전이다. 추기경들은 자신의 필체를 숨긴다. 둘째 날부터는 오전 오후 각 2차례씩 매일 4번 투표가 실시된다. 1978년에는 사흘간 8차례, 2005년엔 이틀간 4차례 투표가 이뤄졌다.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간 직후 추기경들의 모든 외부 접촉은 차단된다. 콘클라베와 관련된 일을 평생 비밀로 한다는 서약도 이뤄진다. 하지만 최근 이 서약은 사실상 권고조항으로 바뀐 듯하다. 이탈리아의 한 정치잡지는 2005년 한 추기경의 일기를 입수해 투표 결과를 보도했다. 베네딕토 16세는 마지막 투표에서 전체 115표 중 84표를 얻었다.
교황직을 차지하기 위한 교회 개혁파와 보수파의 물밑 경쟁은 치열하지만 콘클라베 기간엔 선거운동이 허용되지 않는다. 유세는 콘클라베 이전 추기경들의 자유 활동이 가능할 때 주로 이뤄진다. 추기경들은 사전 모임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때론 격론을 벌인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은 2005년 콘클라베에서 치밀히 준비해 지지층을 확보했다. 그는 아시아·아프리카 추기경들과 아침식사를 했고, 점심에는 미국 추기경들과 함께 당시 미국 가톨릭계에서 파문을 일으켰던 아동 성추행 문제를 고민했다. 교황청 핵심요직인 신앙교리성(옛 이단심문소) 장관 출신의 수석추기경이라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추기경들은 전임 교황 장례식을 장엄하게 주재한 그를 차기 교황감으로 여겼다.
다음 달 열릴 교황 선출회의 참석 자격이 있는 추기경은 전체 209명 중 117명이다. 유럽 출신은 61명, 중남미 19명, 북미 14명,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각 11명, 오세아니아 1명이다. 이탈리아가 28명으로 가장 많다. 평균 연령은 72세. 다만 일부는 건강, 고령을 이유로 불참을 통보해 실제 참석자는 유동적이다. 이탈리아는 역대 교황 265명 중 210명을 탄생시킨 최다 교황 배출국가다. 국가·대륙별로 안배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탈리아인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1978년 선출된 요한 바오로 2세(폴란드인)는 1522년 이후 첫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다. 현 교황은 독일 출신이다.
흰 연기와 하베무스 파팜
추기경들은 투표가 한 차례 끝날 때마다 투표용지를 태워 굴뚝으로 연기를 내보낸다. 검은 연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교황이 선출되면 흰 연기가 나온다. 요즘엔 화학약품으로 연기 색깔을 조절한다. 이탈리아 일간 라 레푸블리카에 따르면 2005년 4월 19일 새 교황 선출 직후 성당 내부에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성당 직원들이 약품을 잘못 사용해 흰 연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몇 차례 시도 뒤에야 시스티나 성당 굴뚝에 흰 연기가 솟아올랐다.
새 교황으로 선출된 추기경은 수석추기경에게 “받아들인다(accepto)”고 답변하고 자신이 사용할 교황 이름을 정한다. 과거엔 이 말을 하지 않고 숨거나 끝까지 거부한 추기경도 있었다. 교황 이름은 성인 또는 역대 교황에서 따온다.
이 절차가 끝나면 새 교황은 ‘눈물의 방’에서 붉은색 추기경복을 교황의 흰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독일 추기경들은 AP통신에 “8년 전 교황 선출 직후에 성당이 박수갈채로 가득찼지만 새 교황은 중압감 때문인지 고독해 보였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새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의미로 ‘어부의 반지(페스카토리오)’를 손가락에 낀다. 이 반지는 교황이 공식문서를 날인하는 데 사용되며, 선종할 때까지 빼면 안 된다.
수석추기경은 외부로 나와 선언문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교황이 탄생했다)’을 낭독한다. 마지막 의식은 교황의 몫이다. 새 교황은 대중 앞에 서서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로마와 전 세계에게)”라는 말로 전 세계에 축복을 보낸다.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