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끝] 밀라노 칙령 1700주년을 기념하며
입력 2013-02-22 20:01
올해는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지 꼭 1700년 되는 해다. 313년 6월 15일에 공포된 밀라노 칙령은 서양세계에 있어 신기원에 해당하는 날이다. 이 시점을 계기로 이교 전통의 그리스·로마 세계는 바야흐로 기독교 시대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밀라노 칙령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째는 박해시 몰수한 교회 재산을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독교 신앙에 자유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로마의 다신 종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유대교 및 다른 여러 종교도 신앙의 자유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 자유를 부여한다는 것은 지중해 세계에서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조치였다. 하지만 1세기에 기독교가 탄생한 이후 약 250년간 기독교 신앙은 암묵적으로 허용된 때조차도 합법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기독교 신앙에 자유를 부여하는 밀라노 칙령에는 커다란 의의가 있다.
기독교 가르침받은 콘스탄티누스
보다 중요한 점은 밀라노 칙령 이후 서양세계가 기독교 세계로 급속도로 전환하는 데에 있다.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어린 시절 기독교 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세 아들은 어릴 때부터 유명한 기독교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아울러 콘스탄티누스 가문 이후로 로마 역사에서 기독교인이 아닌 황제는 단 한 명도 없다. 더 놀라운 것은 밀라노 칙령이 공포된 지 불과 70여년이 지난 후 이교 로마제국이 막을 내리고 ‘기독교 로마제국’으로 다시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2월 28일 로마제국의 모든 백성은 삼위일체 기독교 신앙을 믿어야 한다는 법을 선포함으로 ‘기독교 로마제국’을 선포했다. 불과 두 세대 전에 신앙인들을 박해하던 바벨론적(이교적) 로마제국이 기독교 신앙을 헌정 질서로 삼는 기독교 국가로 재탄생하다니 이 시대의 역사적 급반전은 현대인의 눈에도 신기할 정도다. 이때 이후로 서양세계는 기독교 문화가 뿌리 내렸고 현대 서구 문명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문명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그런데 서양세계가 기독교화되는 역사를 정치사의 입장에서만 보는 것은 피상적이다. 밀라노 칙령 이후 서양에는 기독교밖에 없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꼭 그렇지는 않다. 4세기 말 ‘기독교 로마제국’이 탄생한 때에도 이교문화는 여전히 건재했고 이교 신앙을 간직한 고위 관료도 절반이 넘었다. 5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이교문화는 건재했다. 게르만족이 서로마제국을 무너뜨린 460년 이후 적어도 8세기 이전까지 서유럽은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아니었다. 동유럽과 러시아의 경우도 7∼8세기가 돼야 기독교화가 진행된다. 기독교 유럽 세계의 탄생을 정치와 종교의 결탁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권력이 누구의 손에 있든가 관계없이 유럽세계에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기독교 영성에 그 열쇠가 있다고 본다.
단순히 밀라노 칙령만으로가 아니라 그때 즈음해 탄생한 기독교 영성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기에 탄생한 영성은 단순히 종교적 영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혁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수도적인 삶을 택한 자들은 안토니오스의 생애 같은 문학 작품을 왕성하게 집필했다. 문학뿐 아니라 신학과 예술, 심지어 그리스·로마의 고전 유산도 수도자들의 손을 통해 전수됐다. 현대법의 근간이 되는 로마법의 경우 12세기 이후로 수도자들을 통해 서방세계에 다시금 확산된다.
특히 수도자들에 의한 사회복지사업은 눈부신 것이었으니 이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마 25:35∼36). 보육원, 양로원, 병원, 구빈원, 여행객을 위한 호스텔 등을 서양 문화에서 처음으로 만들고 약 1200년 이상 그 운영을 담당했던 주체들은 바로 수도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이었다. 종교개혁기를 전후한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런 사회복지 기관들의 운영 주체가 시의회와 국가로 점차 바뀌게 된다. 이렇듯 서구 문화와 문명 자체가 기독교 영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이기 때문에 그리스·로마 문화권을 벗어난 민족들조차 기독교 신앙으로 동화되고 누가 정권을 갖든 관계없이 기독교 문화가 유지되고 발전됐던 것이다.
수도적 영성의 두 가지 교훈
4세기 이후 기독교 세계의 바탕이 됐던 수도적 영성의 교훈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마음의 욕(慾)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하나요, 사회적 약자를 돌보라는 것이 다른 하나다. 이런 기독교 영성이 우리에게 낯선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나 경쟁 사회에 걸맞게 재화를 창출하거나 경쟁자를 압도할 능력을 빚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내가 구원받는 것도 아니요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인간 욕망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는다면, 아울러 약자에 대한 배려를 뿌리 깊게 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적인 사회로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내가 4세기 초대교회 영성에서 배우고 있고 앞으로도 더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라고 본다.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날 책망받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