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교회가 있었네-신안교회] “이 종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해주세요”

입력 2013-02-22 17:36


신안교회는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에 있다. 행정구역상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의 북쪽에 있는 상신안리에 교회가 세워졌다. 상신안리는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경북 금산군에 이어 충북 황간군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북 영동군에 편입됐다.

교회가 있는 곳은 ‘반고개’라 불린다. 이 명칭은 조선시대 부산에서 한성까지 가는 길의 중간지점이 바로 이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 당시 이 지역을 지나던 선비들이 하루 저녁 쉬어가는 주막들이 즐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간호 중에도 교회걱정

지난 6일 찾아간 추풍령면 일대는 전날 밤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고 산바람은 차가웠다. 얼어붙은 고갯길을 넘는 차량들은 거북이 운행을 했다.

교회 인근의 안동네마을에 35가구, 1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이들의 주업은 사과 포도 등의 과수 농사다. 장을 보거나 병원에 가려면 자동차로 20여분 걸리는 김천시내로 나간다. 차로 40여분 가야 하는 영동읍보다 김천이 더 가깝기 때문이다.

마을 분위기는 교회에 적대적이지 않지만 무속신앙과 사찰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면서 연초에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던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 현상덕(86)씨는 “절에 다니는 자식들이 ‘교회에 나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해서 요새는 교회에 잘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 수도 워낙 적어 신안교회의 성도는 14명뿐이다. 이마저도 70대 이상의 어르신 성도가 대부분이다. 2009년 2월 부임한 김선태(46) 목사는 “얼마 안 되는 마을 분들이 섬기는 작은 교회지만 성도 간의 끈끈한 정은 어느 교회보다 깊다”고 말했다.

어느 집의 몇 번째 자녀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집의 큰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성도들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교인들이 달려가 기도를 해주는 따뜻한 문화도 이어진다. 지금 성도들의 가장 큰 걱정은 오랜 시간 한 가족처럼 지낸 현광술(83) 집사의 건강이었다.

현 집사는 지난 4일 김천의 한 병원에 입원해 다음날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았다. 전에 그는 뇌경색으로 입원한 적도 있다. 김 목사와 몇몇 성도들은 6일 현 집사를 병문안했다. 김 목사는 병실에 누워 있는 현 집사의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현광술 집사와 함께하시어 하루 빨리 건강을 되찾아 교회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도들은 현 집사뿐 아니라 남편 병수발하느라 교회 종을 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는 장계순(72) 권사를 위로했다. 장 권사는 24세 때부터 48년간 오전 4시40분에 교회 종을 울렸다. 남편을 돌보느라 좁은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는 그는 “오늘은 종을 못 쳤는데 누가 치셨는가 모르겠네”라며 “보통 20번 정도 치는데 ‘하나님 아버지, 이 종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다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해주세요’ 하면서 줄을 당긴다”고 했다.

왜 혼자서 오랜 세월 종지기 사역을 담당했느냐는 질문에 “시집 와서 6개월 지난 다음부터 치기 시작했는데 가까이 사니까 계속 쳤다”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니까 교회 종이라도 울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김 목사는 “종 치는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시고 병간호에만 신경 쓰시라”고 했다.

57년 전 초가집 교회로 시작

기독교대한감리회에 소속된 신안교회는 1956년 7월 설립됐다. 흙벽을 세우고 지푸라기를 엮은 지붕을 얹은 예배당이었다. 20㎞쯤 떨어진 용문산 기도원까지 걸어가서 예배를 보던 주민들이 마을 가까이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한 주민은 “저 교회는 몇 번이나 겉모양이 바뀌었는지 모른다”며 “믿음으로 산다는 사람들이 흙방에 모여 시작한 게 신안교회”라고 설명했다.

30년 전쯤까지 예배당에 남자·여자용 출입문이 따로 있을 정도로 마을에 유교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마땅한 놀이시설이나 장난감이 없던 당시 마을 어린이들에게 교회는 놀이터이자 학교였다. 한 주민은 “어디 놀 데가 없었으니까 3∼4살 터울 10여명이 일단 교회에서 모였었다”며 “교회에 가면 공부도 하고 태권도까지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초창기 주일마다 30∼50명이 작은 교회를 꽉 채웠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성도는 급격히 줄었고 교세는 기울었다.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한 승합차는 자주 고장을 일으키다 3년 전 폐차됐다. 김 목사는 “아무리 어려워도 교회 문을 닫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교회는 그냥 세워진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재정이 넉넉지 않은 추풍령면의 교회 8곳은 추풍령면기독연합회를 구성해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고 각종 행사를 함께 치른다. 2010년 농어촌교회 자매결연 사업을 통해 인천의 한 감리교회 청년들이 낡은 신안교회 내부를 리모델링해주기도 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교회의 명맥이 근근이 이어지는 큰 이유는 성도들의 순수한 열정 덕분이다. 최고령 성도인 정석숭(92) 권사는 “배운 사람이 믿어야 뭘 깨닫기라도 하는데 원체 무식한께…. 우리는 마음만 선하게 먹으면 된다는 가르침을 받으려고 교회 일이라면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 토박이인 정 권사는 “6·25사변 겪으면서 인민군도 왔다 가고 미군들도 지나갔는데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며 “돈 있는 사람들은 피난을 내려갔지만 나는 돈도 없고 양식도 없으니까 죽 마을에 살았다”고 말했다.

정 권사의 신앙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그의 아들은 안동네 이장인 정덕수(50) 권사다. 마을뿐 아니라 교회 일에도 앞장서는 ‘젊은 일꾼’이다. 정덕수 권사의 자녀 2명도 각각 대구와 천안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데도 주일마다 신안교회를 찾아와 예배를 드린다. 정 권사는 “신안교회에 부임하는 분들은 대부분 전도사님이었고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 5년 안에 떠나는 분들이 많았다”며 “나 같은 젊은 사람이 더욱 열심히 교회를 섬겨서 교회가 부흥하는 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19세 때 시집온 박희천(75) 명예집사는 김 목사의 헌신으로 4년 전 하나님을 영접했다. 박 집사는 “전에는 하도 사는 기 힘들어서 안 나왔는데 목사님이 생일날 장미꽃 선물을 해주시고 말씀도 참 재밌으시고 잘 챙겨주셔서 교회에 다닌다”고 말했다. 박 집사는 “우리 친정아버지가 ‘진 명(긴 생명)은 사리주고(실처럼 동그랗게 잘 감아주고) 짧은 명은 이서주고(이어주고)…’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나도 교회에 나오면 오래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면서 웃음을 지었다.

건강에 이상이 생겨 6년 전 귀촌한 우찬홍(59) 집사는 “서울의 큰 교회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어 좋다”며 “낯선 사람한테도 살갑게 대해주시는 성도님들께 항상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부모님 뜻 따라 목회하는 3형제

3남2녀 중 넷째인 김선태 목사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3형제 모두 목회를 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충남 보령의 섬인 삽시도 등지에서 20여년간 목회를 하다 은퇴한 김광수(76) 목사다. 첫째아들인 김진태(52) 목사는 충남 홍성군 광천은파교회에서, 막내 김희태(44) 목사는 경기도 평택의 초대교회에서 시무한다. 과묵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무릎(기도)으로 살아라. 말씀과 기도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강조하셨다고 한다.

“부족한 게 많지만 우리 아들들을 꼭 목사님으로 만들어주세요.” 그의 어머니 신옥희(76) 사모는 새벽예배를 드린 뒤 3형제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3형제는 중·고교 시절 어머니의 이 같은 간절한 기도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다른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신앙이 두터웠지만 김선태 목사는 그렇지 않았다. 김 목사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93년 한성신학대를 졸업했지만 목회를 하겠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는 “세상것이 좋아서 대학 졸업 후 외판원도 하고 일용직도 해봤다”며 “둘째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말대로 방황한 시간이 꽤 길었다”고 말했다.

세상적인 성공을 좇다가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기도했다고 한다. “탕자처럼 지내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라며 “간혹 힘에 부칠 때가 있지만 목회자로서의 삶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98년 협성신학대원을 졸업한 그는 충남 청양 등지에서 목회하다 2009년 신안교회에 부임했다.

신안교회의 비전은 안동네의 주민 모두가 주님 앞에 나오는 예수마을을 만드는 것. 김 목사는 “우리 교회의 비전은 이사야 60장 1절 말씀에 담겨 있다”고 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주민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마을 35가구뿐 아니라 상·하신안리 모든 주민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겠습니다.”

▶신안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자동차로 갈 경우 3시간 정도 걸린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추풍령IC로 나와 광천삼거리에서 김천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담령교를 지나 광천네거리에서 대전·영동 방면으로 좌회전해 4번 국도를 타고 1.5㎞를 달린다. 추풍령교차로에서 모동·추풍령 방면으로 우회전해 300m를 이동한다. 대교삼거리에서 모동 방면으로 4㎞를 가면 신안보건진료소 맞은편에 교회가 보인다.

영동=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