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천재가 아닌 인간으로서 고뇌하는 율곡
입력 2013-02-21 17:47
율곡 이이 평전/한영우/민음사
한 소년이 있었다. 16세 때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에 다녀오느라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가운데 어머니를 잃었다. 소년은 정신적 허탈감에 빠져 지내다가 19세에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출해 1년간 금강산의 승려가 됐다. 1년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과거 시험에 매진했지만, 한동안 선비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과거(科擧) 시험장에선 옆에 앉아 시험 보는 것조차 거부당했다. 요샛말로 ‘왕따’를 당한 것이다.
퇴계(退溪)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는 율곡(栗谷) 이이의 이야기다. 훗날 율곡은 임금에게 “그때의 심정이 죽고 싶도록 부끄러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명종실록’엔 그가 이모부 홍호(洪浩)에게 쓴 글이 있다. “어머니를 잃는 재앙이 참담하게 몸에 다가오고, 방향을 잃은 병이 마음을 때려서 미친 듯이 산속으로 달려가고 넘어지고 뒤집혀서 제자리를 잃었습니다.”(66쪽)
더 중요한 대목은 다음 문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성인(聖人)과 보통 사람은 모두 똑같은 성(性)을 가지고 있으며 성인과 보통 사람이 다른 것은 오직 기(氣)뿐입니다. 따라서 제가 미친 지경에 빠진 것은 저의 기 때문이지 성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유명한 ‘우주론적 이기론(理氣論)’의 싹이 이때부터 움텄던 것이다.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어머니 신사임당의 보살핌 속에 행복하게 자랐을 것 같은 율곡의 성장기는 이렇듯 고뇌에 찬 반전이 있다. 청소년기의 고뇌와 시련이 율곡을 한층 성숙한 인간으로 만드는 약이 됐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50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했다. 무능력한 남편을 지켜봐야 했던 신사임당은 마음고생이 컸을 것이다. 게다가 집에는 남편의 첩도 있었다. 율곡이 쓴 ‘선비행장’에는 “집에 희첩(姬妾)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명종실록’에는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뒤 서모(庶母·아버지의 첩)가 율곡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그가 13세 때 진사 초시에 급제한 이래 19세 때 문과에 급제하기까지 무려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한 것은 천재성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율곡은 벼슬길에 나가서는 임금인 선조에게 끊임없이 진언을 했으며 조선의 민생을 살리려고 애쓰다 49세에 타계했다. 이조판서까지 지낸 그의 청빈은 사후에 서인들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비용은 친구들이 부담했으며, 처자들이 살 집이 없어 문생(門生)과 고구(故舊)들이 재물을 모아 조그만 집을 사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152쪽)
저자인 한영우 이화학술원장은 “율곡을 다시 조명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천재성이나 그의 사상과 정치적 행적을 미화시키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인간 내면에서 관찰하면서 인간으로서 고뇌하는 모습을 내보이고 싶었다”며 “오히려 자신의 약점과 흠을 슬기롭게 극복했기 때문에 위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터이다”라고 말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