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MB의 ‘레짐 체인지’

입력 2013-02-21 18:07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악의 축(Axis of Evil)’ 발언으로 유명하다. 2002년 연두교서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 국가라고 표현했다. 전년도에 9·11을 겪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렀던 미국은 부시의 이 말로 대(對)테러 전쟁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담근다. 부시 뒤에는 공화당 내 초강경파 ‘신보수주의(Neo Conservatism)’ 세력이 있었다.

신보수주의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현실만이 ‘절대선(善)’이며 이를 다른 세계에도 이식해야 한다는 주장을 첨가한 점에서 현상유지에 주안점을 둔 기존 보수주의와 구별된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집권세력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개념을 모든 다른 국가를 평가하는 준거 틀로 활용했다. 그들의 기준으로 이라크는 반민주 독재국가였고 이 세상에선 없어져야 할 ‘절대악(惡)’으로 여겨졌다. 이란이나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의 기본노선으로 채택됐던 현실주의 외교정책은 종적을 감추고, 대신 그 자리에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악의 축’ 국가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강경정책이 들어섰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정권은 이런 미국 신보수주의 정책에 따라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부시는 이라크전쟁의 대의를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 교체)’로 표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레짐 체인지’를 거론했다. “북한 정권이 바뀌지 않고는 결코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 핵심인사들은 이 용어를 수도 없이 사용했다.

5년 동안 북한 봉쇄에 나섰던 현 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퍼주기’ 때문에 북한이 핵개발을 멈추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출발했다. 이 정책은 부시 전 대통령의 ‘신보수주의 외교노선’에 ‘악의 축’ 용어 대신 ‘북한’을 대입하면 거의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에 대해 어떠한 지원도, 대화도 하지 않는다는 방식은 결국 “그런 불량국가의 불량한 정권은 바꿔야 한다”는 식으로 결론지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 정권 교체는 곧 북한의 붕괴를 의미한다. 대통령이 이를 대북정책의 핵심으로 언급했다는 것은 북한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메시지와 다를 바가 없으며, 이는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추구해 왔던 ‘점진적인 평화통일’ 정책기조와 전혀 다른 울림이다.

남한 정부가 평화통일을 기본적인 대북정책으로 채택해온 것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남북 공멸’이라는 현실인식에 따른 것이다. 가장 반공(反共) 성격이 짙었던 박정희 정권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도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서는 남북 휴전협상 정식조항으로 들어가 있는 ‘평화체제’라는 말이 마치 불온한 종북세력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게 됐다. 북한이 3차 핵실험으로 핵보유국 단계에 접어들자, 국내에선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온다.

이명박 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이 과연 ‘성공’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을까. 미국의 신보수주의는 미국 국내에서조차 ‘실패’ 낙인이 찍힌 채 폐기 처분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대외정책으로는 복잡한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없다는 게 부시 이후 미국 정부의 결론이다. 우리 정부라고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